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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35)남로당 푸락치 김정제(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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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건국 초 최악의 불씨는 각계에 침투해있던 남로당 푸락치의 파괴활동.
이들 좌파조직이 큰 위협으로 남아있었던 것은 8·15 직후의 정가를 공산당과 진보적 사회주의 연합세력인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 좌파가 휩쓸었던 정치바람의 여진이 새 정부를 괴롭힌 것이다. 반공은 새 정부 최대의 명제였다. 친일파에 대한 관대한 처리, 총독부 출신 관료의 행정지배는 반공을 위해 승인되었다.
이로 인해 총독치하의 행정패턴이 되살아났다. 방대하고 강력한 경찰의 필요는 일제경찰의 부활로 이어졌다.
계속되는 혼란과 정치적 갈등은 반공이라는 이름의 정치모략과 탄압을 수반했다. 이것은 새 나라가 이룩해야할 민주질서의 멍에였다.
남로당은 정부수립 이전에 이미 존립의 기반을 잃고 있었지만 그 뿌리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여순 반란사건은 남로당 지하조직에 사찰력을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여순 반란사건 관련자의 색출에 이어 군부 내 남로당 세포조직에 대한 사찰을 단행했다.
이범석 국방장관 특명으로 이뤄진 조사에서 군 수사기관은 1천명에 이르는 장병을 기소하거나 예편시켰다. 이 무렵은 군뿐만 아니라 정부 내 각 기관에 대한 사찰도 동시에 강화했다. 국회 푸락치 사건도 그런 과정에서 적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관제빨갱이」라는 말이 나왔다. 온당치 못한 올가미 수사나 모함수사도 있었지만 또 그만큼 지하조직을 가려내는 일이 어려웠다.
그 시기 정부 내에서도 푸락치 혐의자가 드러났고 경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럴 때 드러난 경찰 내 간첩혐의자는 치안국 경무과장 김정제 경무관. 최초의 정부고위관리인데다 혐의자가 경찰의 요직을 담당하고 있다는데서 자못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 사건수사는 깊이 있게 다뤄지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그후로 9년 동안 간첩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성주씨(전 국회의원·당시 치안국사찰과장) 『49년 8월인가 9월에 치안국 경무과장인 김정제 경무관이 좌익분자인 것 같다고 서울시경에서 치안국에 조사를 의뢰했다.
김경무관이 의심을 받게된 것은 당시 치안국에서 발행하던 「정치정보」 때문이었다. 「정치정보」는 치안국에서 매일 발행하는 정치동향에 관한 비밀서류로 대통령·부통령·각 부장차관·치안국 국·과장들에게만 배포되었으며 외부 유출을 금지하고 항상 반납할 수 있어야했다. 그런데 시경 측이 38선 부근에서 간첩을 검거했는데 이 「정치정보」에 실렸던 것들이 그대로 씌인 보고서를 갖고 있었다. 결국 시경의 의뢰대로 정치정보의 배부처를 모두 조사하고, 반납토록 통보했으나 김경무관만이 몇 부를 반납하지 못해 추궁을 당했다.
그는 얼마 전 자기 집에서 승용차가 불이 난적이 있는데 그 때 서류를 놓고 내렸다고 변명을 했다. 당시 그의 승용차의 화재는 일부러 지른 것도 같았지만 고위경찰이어서 의심을 안 했다. 또 당시 치안국과 서울시경간에 상당히 알력이 많았으므로 시경 측은 계속 김이 좌익분자라고 주장했으나 치안국에선 철저히 조사하지 않았다.
그런 때인데 충북 음성의 한 중학교에서 좌익지하조직이 발각돼 그 학교의 교감 등이 체포되고 채모 경찰서장도 체포됐다.
현지 조사로는 김정제 밑에서 경무과에 근무하던 전삼평·김현(?) 등 세 총경이 음성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연락이 와 그들을 영등포서에 구금시키고 수사를 했다. 당시 나는 사찰과장이었으나 청년단 출신으로 좌익을 너무 밀어붙인다는 말이 있어 공정을 기하기 위해 수사지도과장이던 이하영이 조사를 맡았는데 김정제 경무관은 희미하나마 배후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에 대한 혐의는 뚜렷한 확증이 없어 49년 경찰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그쳤다.』 ▲오제도씨(당시 서울지검 검사) 『김정제는 8·15가 되자 동대문경찰서장에 취임했으나 몇 개월 못 가 신탁통치반대사건으로 미군정으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 뒤 정부가 수립되자 치안국 보안과장으로 임명되었고 5개월 뒤 경무과장으로 전임했다. 이 때 그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시 동경제대출신으로 공산당에 가담하고 있던 한규학으로부터 법학동맹 또는 과학자동맹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았었고, 경성제대 동창이며 변호사인 이종갑으로부터도 남로당 가입을 권유받았다고 뒷날 진술했다.
김은 이들과 접촉하다 남로당 중앙당부 특수부에 입당, 각 도에서 보고되는 공비토벌 상황 등이 실린 「치안일보」와 국회에 관한 기록을 당에 제공했다.
이 같은 범죄사실이 탄로되어 50년 5월2일 동대문경찰서에 피검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있던 중 6·25 때 탈옥했다.』
김경무관은 충남 보령출신. 광주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법문학부(현 서울대문리대)를 나온 그는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총독부의 관리로 경기도 파주와 양주 두 곳의 군수를 지냈다.
8·15 후 서울에 온 그에게 주어진 것이 동대문경찰서장, 이 때부터 그는 경찰로 전신했다.
그가 간첩혐의를 받았으면서도 수사에서 벗어난 것은 이성주씨의 증언 그대로 서울시경과 치안국의 불화 때문. 두 기관의 불화는 미군정 때부터의 해묵은 경쟁관계에 연유한다. 미군정 당시 장택상 수도청장은 조병왕 경무부장과는 친구사이라는 것도 있지만 성격상의 차이로 위계질서를 무시한 단독행동을 많이 했다.
특히 조경무부장은 여론을 의식해 좌익소탕에는 신중을 기하려한 반면 장수도청장은 좌파소탕에 관한 한 저돌적이었다. 이 때문에 경무부는 수도청이 경무부 지시를 무시한다고 해 견제했고 시경사찰과장이던 노덕구 총경의 피의자고문 치사사건을 적발해 신문에 흘려주어 시경을 난처하게 한 것도 이런 불화 때문이었다.
새 정부 수립 후에도 이 불화는 계속됐다. 마침 서울시경국장이 된 김태선씨는 도미유학파로 이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내무장관 치안국장 등 그의 직속상사를 제쳐놓고 경무대에 직접 보고도 하고 지시도 받아 내무부와 치안국의 질시를 샀었다.
거기에다 김정제는 좋은 배경을 능숙하게 활용했다. 그 무렵 경성제대출신들이 검찰과 행정부에 영향력이 컸고 이들이 그를 감쌌다. 그랬지만 그의 간첩협의는 물증은 뚜렷지 않았지만 심증으론 혐의가 짙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는 6·25 후 형무소를 나와 북으로 넘어갔다가 1·4후퇴 후 전선을 뚫고 부산으로 남하해와 위장 자수했다. 당시 의심되는 점이 많았지만 마침 도중에서 동료였던 경찰간부를 찾아 그와 함께 왔고 소식을 들은 성대 동창들이 그를 변호해 그의 전향을 믿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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