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감 안 나는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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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어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도 요즘처럼 어려운 시설이 있었을까를 필자는 가끔 생각하게 된다.
소설은 어차피 복잡다단한 현실의 한 단면을 묘사하게 마련이고, 그런 어떤 현실의 이야기에 한 작가의 시대정신, 나아가서 세계관이 잘 용해되어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 현실,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현상들은 이미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술에 취한 한 민중의 지팡이는 단시간 안에 60여명의 죄없는 민간인을 사살했다. 허영기가 몹시 심했던 듯한 한 여자는 7천억원을 주물렀고, 그녀의 한달 생활비는 3억원 이상이었다. 허풍선이임에 틀림없었던 한 은행원은 남의 돈을 80억원씩 사기쳤다.
이런 가공할, 비현실적인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에는 힘겨운 현실의 이야기가 매일 일어난다. 비단 우리 나라의 경우만도 아니다. 개전한 지 이틀만에 아르헨티나군인 5백여명이 수장되고, 중동에서는 한꺼번에 최신예 비행기가 백대씩 하늘에 날아 좁은 땅덩어리를 박살내고, 인기복서들은 한 시간 남짓 양팔을 휘두르고 무려 1백억원을 번다.
도무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인플레되어버린 수치들은 이미 현실감이 전혀 없는 것들이다.
돈이란 여전히 1원부터 출발하고, 평생 근검절약해서 기천만원을 모아야 되는 것이다. 사람은 우연한 사고로 한명 단위씩 죽어가야 한다.
전쟁에 낭만이 사라진지는 오래되었다는 시시껍절한 우스개 말을 자제하더라도 전투란 피아간에 사상자를 극소화시키기 위해 대치도 하다가 간헐적으로 총질도 하고 하늘에는 10여대의 비행기가 바람처럼 날아와서 공습하다가는 사라지곤 하는 일종의 약속된 놀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버튼을 한번만 누르면 사상자가 백명 단위로 발생하고, 역시 우스개 같은 말로 『콩나물 1억원어치만 주세요』식이 보편화되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이라는 게 도무지 이처럼 비현실적이다. 가장 뛰어난 작가의 상상력만이 향유하는 어떤 영역도 오늘의 현실은 가차없이 짓밟아 버린다.
상상력은 꿈틀거릴 자리를 잃어버렸고, 따라서 이야깃거리가 없어져 버렸다. 요즘의 소설들이 자기위안의 한 방편처럼 느껴지고 있는 이유도 우리 현실의 그 소위 「실물」을 모르고있거나, 또는 알고있어도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해서 작가들 개개인의 시대정신이 현실 저쪽인 피안으로 숨어버린 데 있지 않을까? 실감이 나지 않는 현실을 묘사하려니 낯이 간지럽고, 독자들이 매일 목격하는 우리 현실의 실물에 접근하려니 공연히 사기꾼이 되고만 기분에 빠져들고….
우리 현실에 제법 밀착되어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지만, 이미 실물과는 동떨어진 사이비현실 정도나 설명하느라고 오늘도 전전긍긍하는 작가들은 미구에 제 소임을 현실이라는 괴물에게 강탈당하는 때가 올듯하다.
그러면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걱정을 덜게되어 편한 백성이 될 테지만, 그런 현실은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오히려 불편한, 사기꾼 같은 세상일 것이다.
김원우

<작가·77년 한국문학신인상으로 데뷔. 『무기질 청년』 『짐승의 말』등 작품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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