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내 기억은 믿을 만한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에 용덕한(龍德韓)이라는 선수가 있다. 동아대를 졸업하고 지난해 말 입단한 신인 포수다. 주전 포수 홍성흔 선수가 다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종종 포수 마스크를 쓴다.

하루는 신문사로 항의 전화가 왔다. "중앙일보에 오.탈자가 너무 많다"는 항의였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한용덕을 용덕한이라고 쓰면 어떡하느냐"는 것이었다. 아하-. 한화 이글스에 한용덕(韓容悳)이라는 투수가 있었다. 강속구는 아니지만 다양한 변화구와 절묘한 컨트롤로 17시즌 동안 120승118패24세이브의 좋은 성적을 올린 투수다. 지난해 은퇴해 지금은 한화에서 스카우트를 맡고 있다.

"한용덕을 잘못 쓴 게 아니고요, 용덕한이라는 선수가 있어요."

"예? 용덕한이라는 선수가 진짜 있어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독자의 전화를 받고 한 가지 깨달았다. '한용덕이 미국에 가면 용덕한이 되겠구나'.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독자는 그래도 신문사에 전화해 사실을 알았지만 똑같은 생각을 하고도 전화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중앙일보는 엉터리'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축구 경기를 취재하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는 분명히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봤는데 어시스트를 한 선수를 틀리게 쓴다든가, 심지어 골을 넣은 선수를 헷갈리기도 한다. 오히려 회사에 전화를 해서 TV 중계를 보고 있는 동료에게 물어본다. "지금 골 넣은 선수가 누구야?"

착시 현상을 소개한 수많은 책은 '내가 본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똑같은 그림을 보고도 한 사람은 예쁜 아가씨라고, 한 사람은 추한 노파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다. 내 눈에는 분명히 꺾여 있는 선인데 사실은 똑바른 직선이기도 하다. 사진작가들은 이런 착시현상을 이용해 절묘한 작품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내 눈도 믿지 못하게 된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라는 책에는 '가짜 기억'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대학생 24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가족들에게 수집한 그들의 어린 시절에 관한 추억 세 가지와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는 가짜 기억 한 가지를 담은 소책자를 만들었다. 그 소책자를 읽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세히 적어 오라고 했더니 절반 정도가 조작된 기억을 너무도 그럴듯하게 묘사해냈다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했다고 확신하는 많은 기억이 사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사람들은 주변의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기억을 왜곡한다는 것이 로프터스 교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정말 맞는 걸까.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혹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문사에 전화를 거는 사람 중 상당수는 '내기' 때문에 전화하는 사람들이다. 친구와, 동료와 서로 다른 기억으로 언쟁을 하다가 급기야 내기를 하고, 신문사에 '정답'을 물어본다. 그런데 오전 2시에 전화해 "1988년 프로야구 신인왕이 누구였나"를 물어보더라도 그게 차라리 낫다.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목소리 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일방적으로 깔아뭉개는 것이다.

'한 음만 낮추면 지하철이 즐거워집니다'라는 지하철 광고가 있다. 휴대전화로 통화할 때 옆 사람을 배려해 소리를 낮춘다면 모든 사람이 쾌적하게 지하철을 즐길 수 있다는 의미다.

내 기억이 맞다고, 내 생각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남의 말은 죽으라고 듣지 않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조금만 낮춘다면, 귀를 1mm만 더 연다면, 이 세상은 살맛 나는 곳이 될 수도 있다.

장마가 끝나고 땡볕에 짜증 나는 요즘, 한 템포 죽이는 지혜도 필요하다.

손장환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