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꿈꾸는 목요일] 아이를 바꾸는 ‘바짓바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8일 메가스터디가 주최한 고2 대상 입시설명회에 참석한 아빠(가운데)가 강연을 듣고 있다. 이 업체는 설명회 참석자 3800명 중 250명 정도가 아빠라고 추산했다. [사진 메가스터디]

지난 8일 오후 2시. 서울 대현동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고2 학부모 대상 메가스터디 입시설명회엔 3800명이 몰렸다. 그중엔 아빠들도 250명 정도 끼어 있었다. 노트북으로 강의 내용을 받아치는 아빠, 자녀와 귓속말하며 메모하는 아빠, 꾸벅꾸벅 졸면서도 눈을 치켜뜨며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아빠…. 고2 딸과 함께 온 김석진(47)씨는 “딸에게 ‘알지도 못하면서 가르치려 든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왔다”며 “족집게 같은 입시 조언을 해줄 순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딸과 더 소통하고 싶다”고 말했다. 홀로 설명회에 온 박성철(45)씨는 “엄마와 아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 ‘나머지 공부’하는 심정으로 왔다”며 “‘아빠의 무관심’이 미덕인 시대는 갔다”고 말했다. 남윤곤 메가스터디 입시전략연구소장은 “아빠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주말이나 평일 저녁을 활용해 설명회를 여는 경우가 많다”며 “수능 직후 설명회엔 참석자의 30% 정도가 아빠”라고 소개했다.

 같은 시각 서울 화곡4동 새마을금고 사무실에선 신곡초 아버지회가 주최한 일일찻집이 열렸다. 파란색 조끼를 입은 아빠 60여 명이 직접 손님들에게 차를 날랐다. 음식은 어머니가, 메뉴판과 실내 장식은 자녀들이 준비했다. 이날 300여 명의 손님이 낸 찻값은 12월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김장 행사에 쓰인다. 15년째 이어온 행사다. 불우이웃을 돕고, 자녀 인성교육도 하자는 취지다. 초3 딸을 둔 아버지회 회장 정윤수(46)씨는 “아빠와 독거노인 가정에 김장을 전달하러 간 아이들이 ‘이렇게 어렵게 사는 분들이 계신지 몰랐다’며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고 전했다. 아버지회는 매주 일요일마다 자녀들과 뒷산·박물관 등에서 놀아주고 학기마다 운동장에서 캠프를 연다. 정 회장은 “아버지회 활동에 참여한 뒤로 말수 적은 딸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고 반장까지 맡았다”며 “회원들끼리 아버지회 덕분에 왕따·학교폭력이 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고 말했다.

 아빠들의 ‘바짓바람’이 불고 있다.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프렌디(friend+daddy, 친구 같은 아빠)’부터 대학 입시에 적극 관여하는 고3 아빠까지 전방위로 확산 중이다. 교육기관에선 ‘아빠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학교에선 아버지회나 ‘좋은 아빠 되기 모임’ 같은 모임이 한창이다. 김종우 양재고 진학부장은 “직장에서 전화로 자녀 진학 문제를 상담하는 아빠가 크게 늘었다. ‘퇴근하고 학교로 갈 테니 기다려달라’는 요청도 받는다”며 “수능이 끝나면 전형별로 유리한 점을 분석한 뒤 어떤 대학에 갈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묻는 아빠도 많다”고 말했다.

 아빠 교육이 자녀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는 연구 결과는 수없이 많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육학과가 자녀가 27세가 됐을 때 수입에 영향을 준 요인을 분석했더니 ‘아빠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석 여부’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이스트버지니아 의대는 우울증을 겪는 아빠를 둔 2세 이하 유아가 사용하는 단어의 수가 일반 아빠를 둔 아이에 비해 적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엄마의 우울증 여부는 유아의 단어 수와 관련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아이에게 엄마의 목소리·행동은 태아 때부터 늘 익숙한 자극”이라며 “아빠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자극이라 교육 효과가 더 크다”고 설명했다. 김영훈 가톨릭대 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아빠는 딸에겐 사랑을 알게 해주는 첫 남성, 아들에겐 남성성을 심어주는 신화적인 존재”라며 “아빠 없는 교육은 절름발이”라고 강조했다.

8일 서울시유아교육진흥원에서 아빠가 자녀와 요리 강연을 듣고 있다(위). 같은 날 서울 신곡초 아버지회 회원들이 자녀들과 함께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일일 찻집을 열었다. [사진 유아교육진흥원·아버지회]

 전문가들은 아빠 교육은 어릴 때부터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어릴 때는 엄마에게 맡기고 사춘기에 소통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이미 늦다는 지적이다. 김유숙 서울여대 교육심리학과 교수는 “뇌 구조가 바뀌는 사춘기 이전에 소통하는 게 아빠 교육의 핵심”이라며 “사춘기 땐 타인을 아군·적군으로 나눠 판단하는데 사춘기 이전에 적군이 되면 무슨 말을 해도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늦었다면 욕심 부리지 말고 ‘밥은 먹었느냐’ ‘옷이 멋있다’ ‘친구랑은 잘 지내느냐’는 식의 간단한 대화부터 시작해 소통을 늘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톨릭대 김 교수는 “어린 자녀는 ‘무얼 가르치겠다’보단 ‘함께 놀아주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초·중·고생 자녀는 입시에 관심이 많은 만큼 아빠도 따라붙어야 한다. 입시 전문가들은 아빠가 엄마에 비해 냉정하고 현실적인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았다. 임성호 하늘교육 대표는 “‘엄마는 정보가 많아, 아빠는 정보가 없어 문제”라며 “자녀 성적부터 파악한 뒤 학교 진로 상담이나 학원 입시설명회에 참석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이재진 진학사 입시전략연구소 팀장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관여하면 오히려 자녀에게 반감만 살 수 있다”며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잔소리를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게임중독 아들을 직접 공부시켜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시킨 사연을 책으로 낸 노태권(58)씨는 “아이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닦달하는 부모가 많다”며 “그런 부모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대신 방법을 제시해 자녀가 스스로 공부할 기회를 빼앗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이 실패를 겪어도 공부를 같이 하며 속도·방향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줬다”고 덧붙였다.

 엄마도 아빠가 자녀 교육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불리 끼어든다’거나 ‘교육은 내가 더 잘 안다’는 식으로 못마땅하게 여겨선 안 된다는 얘기다. 엄마는 가르치려는, 아빠는 놀아주려는 경향이 많은데 둘 다 자녀에겐 필요하다. 김희진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엄마들이 자녀에 대해 더 많이 알지만 아는 정보가 꼭 다 옳은 것은 아니다”며 “엄마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아빠 교육의 고유한 효과가 있는 만큼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