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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①정치] 3. 12·12와 신군부 집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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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1952년 진해 육군사관학교 1학년 때의 전두환(左)·노태우 생도

권좌
1988년 2월 25일. 취임하는 노태우 대통령(左) 과 퇴임하는 전두환 대통령.

감옥
12·12 및 5·18 1심 선고공판의 전두환(右)·노태우 전 대통령. <중앙포토>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18년 권력’은 끝났지만 역사는 바로 민주주의로 넘어가진 않았다. 박 대통령이 후원했던 정규 육사 엘리트 비밀조직 하나회는 79년 12·12로 권력을 쥐었다. 두 번째 군사정권이 시작된 것이다. 박정희의 5·16과 달리 전두환·노태우의 12·12는 법정에 섰다. 쿠데타의 두 주역은 감옥에 갔다.“성공한 쿠데타를 누가 재판하나”라는 동정론도 한때 있었으나 전·노 대통령의 천문학적 부패 때문에 거의 사라졌다.

1979년 10·26에서 12·12까지는 47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그 짧은 기간에 육군 소장과 대령 몇몇이 군의 급소를 강타하고 육군참모총장을 거꾸러뜨려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비밀의 핵심에는 하나회의 괴력이 있다.

하나회는 정규 4년제 육사가 시작된 11기부터 기수마다 10명 정도씩을 엄선해 만든 일종의 비밀결사였다. 70% 내외가 대구·경북 출신이었으며 리더는 전두환이었다. 하나회가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60년대 중반이다. 63년 2월 박정희 장군은 권력을 민정(民政)에 넘기고 군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전두환·노태우·권익현·손영길·박갑룡 등 11기 5인은 박 장군을 찾아가 이에 반대했다. 박 대통령은 흐뭇해하며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이들에 대한 지원을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회의 배아(胚芽)가 잉태된 것은 5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반도에 여전히 포성이 치열했던 그해 1월 스무살 안팎의 청년들이 진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누구는 가난해서, 누구는 총알받이 전사(戰死)를 피하려, 누구는 장군의 꿈을 안고 첫 4년제 정규 생도가 되었다.

대구서 고교를 나온 전두환·노태우·김복동 그리고 경남고를 나온 최성택은 같은 경상도 출신이라며 어울려 곧 친하게 되었다. 청년들은 장군이 되겠다며 오성회(五星會)란 서클을 만들었다. 각자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용성(勇星·전두환)·관성(冠星·노태우)·여성(黎星·김복동)·혜성(彗星·최성택)이라 불렀다. 나중에 합류한 백운택은 웅성(雄星)이었다. 시종일관 전두환과 라이벌이었던 김복동은 나중에 노태우의 처남이 된다.

전쟁이 끝나고 55년 청년들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전방으로 흩어졌다. 손영길·권익현·정호용·노정기·박갑룡씨가 그룹에 들어와 11기 ‘텐(ten) 멤버’가 완성된다. 손영길·권익현은 73년 윤필용사건에 연루돼 군복을 벗었다. 정호용은 훗날 유명한 ‘광주의 특전사령관’이 된다.

‘텐 멤버’는 하나회 11기 멤버를 그대로 차지했고 하나회의 큰 형님으로 군림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12·12후 대통령을 비롯, 권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93년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개혁의 대표 타깃으로 하나회를 겨냥해 해체해 버렸다.

서로를 별이라 불렀던 발랄한 청년들…. 그들의 말이 권력의 씨가 된 것인가.

김진 정치전문기자

당시 주임검사가 회고하는 12·12수사
묵비권·단식… 전두환, 벼랑 끝 저항

나는 검찰 역사상 전무(前無)하고 후무(後無)할 기록을 세웠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직접 조사한 것이다. 1995년11월 말에 시작된 12·12 및 5·18 사건 수사였다. 나는 서울지검 형사3부장이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주임검사인 내가 직접 신문을 맡아야 했다. 나는 안양교도소로 찾아가 전 전 대통령 앞에 앉았다. 사건에 대해 그는 묵비권으로 맞섰다. 그러곤 30여 일 동안 단식을 감행했다. 그는 간혹 입을 열었지만 12·12의 대의명분을 주장하는 정도였다. 사건의 실체 파악에는 도움이 안됐다. 나로선 화가 났지만 어쨌든 그는 당당했다.

노 전 대통령은 여러모로 전 전 대통령과 달랐다. 그는 가급적 수사팀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않으려 했다. 신문조서를 확인할 때도 전 전 대통령은 대충 한번 훑어보고 서명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구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폈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사건수사에는 쿠데타 세력이 만든 ‘5공전사(前史)’가 큰 도움이 됐다. 이 책은 보안사가 12·12부터 이듬해 5·18(이날 0시 계엄 전국확대)을 거치는 쿠데타 과정을 주요 가담자의 인터뷰를 통해 상세히 기록한 사료였다. 사건 관련자들은 군부대 동원 등을 부인하다가도 이 책을 들이대면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곤 했다.

12·12 수사와 재판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얼룩지게 만든 군사 반란에 대한 최초의 사법적 진실규명이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나중에 사면이라는 정치적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특별법을 만들어 수사를 추진했던 당사자가 역사적 의의를 스스로 훼손한 것이다. 주임검사로서 깊은 회의를 느낀다.

김상희 법무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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