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여인 고문과 무죄|고정웅<사회부 차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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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심 재판부도 원심의 무죄 이유를 그대로 유지했군요.』『무죄가 거듭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만 1심 때의 환호나 기쁨의 흐느낌이 넘치는 뜨거운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1심 재판이 낙차 큰 폭포라면 2심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고 3심은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정리한 대해라 하지 않습니까. 떨어지는 물줄기보다야 조용하겠지요.』
『원심 판결 유지를 어떻게 보십니까.』
『합리적인 사실 인정과 인권옹호라는 형사소송의 이념이 우리 형사 재판에 뿌리를 내린 결과라고 평가합니다 .앞으로 사법살인의 비극은 없어지겠지요.』
『사법살인이라니요.』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한 증거 수집과 그와 같은 의심스런 증거를 근거로 유죄판결을 내리는걸 뜻합니다.』
무죄. 10일 윤 노파 등 피살사건의 고숙종 피고인에게 거듭 무죄판결을 내린 항소심 공판이 끝난 뒤 P변호사와 만나 나눈 이야기다.
처음부터 이 사건은 재판부의 심증 형성이 유·무죄 판가름의 열쇠라고 했다. 직접 증거 없이 오로지 피고인의 자백과 상황 증거만이 입증의 자료였던 만큼 그 자백과 증거의 수집방법·과정이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합법적이었느냐 가 문제였다.
국가형벌권을 대행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는 검찰이 경찰의 수사기록을 그대로. 법정에 제출하는「지게」는 결코 아니었다고 믿고 싶다. 나름대로 진실된 조사방법과 높은 수사기술로 자백의 임의성을 확보하고 그에 대한 보강 증거를 제시했다고 본다.
그런데도 1, 2심 연속패가 아닌가.
결국은 경찰 수사과정에서의 장기 불법연금, 심한 고문과 협박, 그리고 수사담당 경찰관의 피해자 예금통장 절취라는 전무후무할「하 형사 사건」이 검찰의 어떤 노력도 인정받지 못할 장애물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재판이나 수사나 전지전능한 신도 아닌, 모 현장을 목격한 사실도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것인 만큼 불완전하다.
이「불완전」의 극복이 바로 P변호사가 지적한『고문에 의한 증거 수집과 이를 근거한 재판 절차의 추방』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이번 사건은 1심 법원의 무죄 이유나 2심 재판부의 검찰 항소 기각 이유나 모두가 경찰의 고문을 입증한 공판기록이라 할 수 있다.
고문이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모든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특히 불법 체포·구금을 받지 않을 권리, 폭행을 당하지 않을 권리·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 그리고 재판을 받기까지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침해하는 주법이 바로 고문인 것이다.
증거 수집에 있어서 고문이 존재하는 한 사건의 실체적 진실도 소송절차에서 묻혀 버리게 하지 앉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고 씨가 무죄가 났다지요. 잘만 하면 저도 나가겠네 요. 판사 님들이 조금만 이상하면 떨어버린다면서요.』
이사건의 무죄판결 후 어느 변호사가 재소자를 접견했을 때 대뜸 던진 말이라는 것이다.
형사 절차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또 범인일수도 있는 그가 변호사에게 한 이 말은 우리의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다 함께 음미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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