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깊이보기 : 중·러 신 밀월시대

단기적으론 미 대북 강경대응 억제 효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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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9.11 테러 직전까지도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세계질서 주도에 제동을 걸기 위해 미사일방어(MD)체제의 저지라는 공통 이해를 내세웠다. 그러나 9.11 직후 러시아에 이어 중국도 반테러 전선에 적극 앞장섰고, 미국은 이들 양국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해선 북핵과 관련해 적극적 중재를 요청했다. 북핵 사태가 터졌을 때 중재역을 자임하고 나선 푸틴에게는 에너지 시장에서의 지분을 보장, 2004년 재집권을 수월케 해줬다.

언뜻 보기에 부시 행정부는 양국과 각기 다른 공조 채널을 가동함으로써 중.러 연대를 약화하는 데 성공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최근 중.러 양국군은 8월 중순 황해에서 50년 만에 최대 규모의 연합훈련 계획을 발표했고, 중.러 정상은 7월 초 모스크바에서 양자 협력의 수위를 한 단계 올리자는 데 합의했다. 또 며칠 뒤에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 석상에서 중앙아시아 회원국들을 설득, 미군의 중앙아시아에서의 철수를 한목소리로 요구하고 나섰다.

물론 중.러의 전략연대가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러시아제 첨단 전투기와 잠수함으로 중국은 해.공군력 건설의 기틀을 쌓았고, 러시아 방위산업계는 그 수익금으로 고사 직전에서 회생했다. 양국 관계의 내재적 한계를 고려하면 군사동맹으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지난 10년 협력의 실적은 중.러의 전략연대 강화에 훌륭한 배양토가 될 것이다. 사안에 따라선 미국의 일방적 세계 주도에 대한 현존하는 최대의 견제력임을 과시해 낼 수도 있다. 더욱이 양국 간 협력이 경제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군사.전략적 차원에서 더욱 활성화할 가능성도 큰 상황이다.

한반도에 대한 파장도 적지 않다. 일부에서는 양국의 접근을 환영할지 모르지만 중.러 접근은 한반도와 북핵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긍정적 측면은 중.러 연대가 북핵 타결을 위해 북한의 급진적 정권 교체나 이보다 더한 극단적 무력 처방의 유혹으로부터 미국이 자제하도록 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눈을 크게 뜨면 상황은 달라진다. 중.러 전략연대의 가속화는 이미 강화 일로에 있는 미.일 안보공조의 명분을 더욱 부각시킬 것이다.

실제로 미.일 양국은 연말께 대만과의 대규모 연합 군사훈련을 전개할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평화와 번영의 기치를 내걸고 자주 안보노선을 모색하고 있는 한국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굳건한 한.미동맹에 의존하던 냉전기와는 여건이 달라졌다.

한국은 외교와 경제.군사를 포괄하는 모든 안보 영역에서 현안이 대두될 때마다 냉전 종식 이후 그 어느 시점보다도 더 확실한 입장의 선택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크게는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 과정에서부터 작게는 첨단 군사기술의 다변화 시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행동반경은 좁아질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고민은 커져만 갈 수 밖에 없다.

아직 동북아에는 갈등 조정과 평화 정착을 위해 가동되는 다자 대화체가 없다. 국내적으로도 자주안보 기조를 뒷받침할 균형된 외교협상력과 자위적 국방역량이 여전히 부족하다. 중.러 전략연대가 강화될수록 한국의 국가이익과 한반도의 평화.번영을 도모하는 우리 생존전략에 더해지는 짐은 무거워질 수 있다.

심경욱 한국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