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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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유럽과는 달리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문화적인 배경과 경제적인 발전단계, 주민들의 정치의식의 수준이 지극히 다양하다. 구미 선진국들은 태평양 연안국들의 이런 다양성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몇세기 동안의 식민지 경영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후 30년 동안 태평양지역 국가들이 이룩한 성장과 세계사적 개안은 역내의 다양성을 약점에서 강점으로 승격시켜 과거의 단합과 협력의 장애요소를 상호보완요소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가령 태평양 연안에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나라들이 많은 한편 자원빈국이지만 고급인력의 힘으로 지난 70년대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세계적으로도 중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나라들이 있다.
문화적으로도 이 지역은 불교, 유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가 혼재하여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도 볼수 없는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1980년대를 「태평양시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태평양 연안 국가들이 이와 같은 「다양성의 은총」에 힘입어 세계무대에서 주역의 그것에 가까운 존재를 과시하기에 이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전두환 대통령이 「프레이저」 호주 수상과의 회담에서 해마다 태평양 정상회담을 열어 태평양지역의 공동체를 발족시키자고 제의한 것은 이와 같은 역사적인 원근법에서 보면 뜻깊은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전대통령은 작년 초부터 태평양 연안국가들의 수뇌들과 연쇄회담을 가지면서 「태평양 정상회담」의 기초작업을 해왔다.
작년 2월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작년 초여름 아세안 순방, 「트뤼도」 캐나다 수상과 「멀둔」 뉴질랜드 수상, 그리고 이번 「프레이저」 수상의 방한이 모두 전대통령이 구상하는 태평양 협력체제의 실현을 위한 일련의 노력의 연장선 위에서 수행된 일들이다.「태평양정상회담」에서 주요한 파트너로 참여할 일본수상과의 회담 및 협의는 한-일 경협문제의 타결과 때를 같이하여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유럽에는「나토」와 EEC, 아프리카에는 OAU, 미주에는 OAS 같은 지역 공동방위기구나 협력체가 있는데 유독 태평양 지역에만 지역전체를 망라하는 기구가 없다. 이런 사설은「태평양의 평화가 곧 세계평화」라는 말에 비추어 보아도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일본, 호주, 미국에서 환태평양이다, 태평양공동체다 하는 이름의 구상이 빈번히 나오고 지금까지 연구와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과거의 「전과」 때문에, 그리고 미국과 호주는 앵글로색슨이라는 인종적 배경 때문에 태평양공동체 창설을 주도하는데는 문제가 적지 않다는 게 드러났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한국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태평양 정상회담의 실현은 논리적이라고 하겠다.
다만 방법론에 있어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아세안과의 관계, 중공과 대만 및 베트남을 비롯한 인지반도의 참가문제 등이 미묘한 문제로 제기된다. 태평양 국가임을 자처하는 소련의 방해공작 내지는 참가요구도 극복해야할 장애물의 하나다.
그러나 「태평양 정상회담」이 비군사, 비정치적인 성격을 뚜렷이 하고 미국, 일본, 중공같 은 큰 나라 주도가 아닌것이 확실해지면 태평양지역국가들의 공동의 번영과 안정이라는 선의는 결국 받아들여질 것으로 확신한다.
태평양 정상회담은 아시아 지배를 노린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과 다르고, 냉전수행을 위해 미국이 만든 SEATO(동남아 조약기구)와도 다르다. 태평양 정상회담은 태평양의 파도가 그 해안에 부서지는 모든 나라들의 번영을 위한 기구라는 발상 위에서 성공적인 실현을 볼 것을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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