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과 문화

미술품과 시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1980년대 중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국내 미술계가 매우 호황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미술시장의 거품경기는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급속히 쇠락하며 설상가상으로 외환위기의 충격과 함께 긴 불황에 빠져들었다. 미술시장 경기 침체의 장기화는 일반적인 경기 침체에 따른 동반적 침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국내 미술 작품 가격들이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산정됐고, 해당 가격을 객관적으로 인증할 수 있는 체계가 매우 미흡했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예술가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십분 발휘해 훌륭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할 수 있게 하려면 이를 위한 정신적.물질적 후원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다양한 후원의 방법 중 가장 실질적인 방법은 역시 작가의 작품을 직접 구입하는 일일 것이다. 작가가 작품성을 인정받고 명성이 쌓이게 되면 이에 상응해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따라서 작품의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구조에서 볼 때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오늘날 국내 미술시장의 문제점은 바로 그러한 발전적 순환구조가 거의 무너진 상태로 존속돼 왔다는 데에 있다. 한번 구입한 작품을 시장에서 적정한 가격으로 다시 되팔기도 어렵고 구입한 작품이 시간이 흘러도 거의 오르지 못한다는 인식의 팽배는 지난 10년간 미술품 구매 심리의 악순환적인 위축을 초래했다.

그렇다면 이제 모두가 미술작품을 외면하게 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 사회에서 문화 전반에 대한 수요가 날로 커져 가는 요즘 일반인들의 미술 문화에 대한 동경과 특히 피부로 느껴지는 애호가들의 미술품 구입에 대한 진지하고도 실질적인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들은 다만 90년대에 크게 입은 상처가 되풀이될까봐 더욱 신중해지고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감히 우리 미술시장에 전환기가 도래했다고 섣부르게 말할 수 있겠으나 이 시점에서 반드시 거론돼야 할 것이 바로 건강한 미술시장 형성을 위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새로운 기준의 정립 문제다.

그 하나의 긍정적인 예시로서 현재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국내 작가들의 국제시세 형성 과정을 들 수 있는데, 기준에 대한 근거가 더욱 객관적이고 명확한 경우라 할 것이다. 여기서 국제시세는 해당 작가들의 작품을 다루는 국내외 화랑들 또는 경매회사의 감정하에 형성된 가격을 말한다. 이들의 작품 가격은 국내외에서 동일하며 따라서 폭 넓고 객관적인 가격 보호 안전망 속에 놓인 셈이 된다. 최근 해외 미술계와의 다양한 교류 증진, 국제 경매에서의 활발한 판매를 통해 국제시세를 바탕으로 안정되게 시장을 형성해 가고 있는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미술품 가격의 국제시세 형성이 안정된 국내 시장을 위한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미술품은 특정 지역, 민족의 정서와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므로 국제무대에서는 각광 받지 못한 작품이라도 국내에서 커다란 호응과 작품성을 인정받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이때 해당 작품의 가격이 어떤 기준으로 형성되며 일단 형성된 가격에 대한 보호 장치가 얼마나 튼튼한지가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바로 이 두 가지 사안을 정당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해결하지 못한 점이 지난 10년 가까이 국내 미술계를 불황의 늪에 빠뜨린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한 사실을 되새겨 본다면 국내 미술시장의 구매력에 걸맞은 가격의 형성과 가격 보호 장치의 체계가 미술품 구입자.판매자의 순환구조 안에서 합리적으로 마련될 때 미술시장의 진정한 경기 회복이 가능할 것임을 깨닫게 된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

◆약력=이화여대 대학원 순수미술학과, 2001년도 제49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