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명상] 10. 물안개 피는 언덕-조광호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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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오늘도 강화섬에는 봄비가 내린다. 섬에 내리는 봄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허물어진 적막한 물빛 안개 속에서 내린다. 하늘과 바다, 땅의 경계를 넘어 존재하는 일체의 것을 하염없이 적시는 물안개는 거대한 혼돈의 바다를 이루고, 마침내 그 무엇으로도 가늠 할 수 없는 적막한 시공을 만들어낸다.

검은 뻘밭을 지나 연둣빛 신록 사이로 바람에 실려가던 한줄기 안개가 피어오른다. 허공에 뿌린 무희의 희디흰 장삼 자락처럼 적막한 자세로 내려앉다가 물안개 자욱한 허공, 그 어느 곳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다.

세상에서 맺은 그 숱한 인연도 한줌 바람에 실려 저 운무 속에 스러지는 안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일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희망하는 존재'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유한성의 비극을 지니고 이 세상에 홀로 태어나, 철저히 시공에 갇혀 살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인간은 그 원의(願意)를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 원의를 '희망'이라고 한다면 '희망'하지 않는 인간은 이미 인간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때때로 그 희망은 형벌처럼 가혹했다. 그리고 이 형벌이 우리에게 가혹하면 할 수록 더 끈질기게, 죽음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지니며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 땅에 살면서 가혹한 형벌 같은 희망을 목격하지 않고 사는 자가 어디 있으랴. 남과 북의 대표자들이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로 축배를 드는 순간, 우리는 북쪽의 늙은 아들이 남쪽의 구순 노모와 상봉 후 생이별을 하고 돌아서면서, 실신한 노모를 부둥켜 안고 울먹이는 광경을 보았고, 수십년 동안 무고한 사람이 오명에 얽힌 누명을 쓰고 옥살이 하고 나오는 광경을 또한 목격하였다.

민족의 원죄와도 같은 분단이 낳은 절망 앞에 우리의 희망이 그렇다해도, 그러나 어디 그뿐이랴. 수천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사람이, 수천억원의 재산을 부정으로 축적하고도 30만원밖에 저금통에 남은 것이 없다고 법정에서 도리어 큰소리를 치고 나오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그 유족들은 내일 아침, 다시 묵묵히 일터로 나가야 할 것이다.

사회의 관례가 있고 엄연히 법이 있는 법치국가에 우리는 살고 있지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혼돈의 늪에서, 우리 삶의 현장은 산도, 물도 분간키 어려운 카오스의 물안개 같은 곳이라고 감히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저 혼돈의 신비 속에 '던져진 존재'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그 혼돈 속에서 창조를 이루어내셨고, 인류는 혼돈에 맞서 창조적 질서를 찾음으로써 정의를 지켰고, 사랑을 했으며,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켰다.

그러기에 혼돈과 혼란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는 종교는 사랑이 담긴 정의와 진리를 잉태하는 창조적인 사랑의 종교가 될 수는 없을 것이고, 혼돈과 혼란을 직시하지 않는 예술과 과학은 참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저 혼돈의 신비 앞에서도, 가혹한 형벌 같은 희망으로 묵묵히 '선이 악을 이겨내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 그 익명의 사람들에게 감춰진 겸허한 진실보다 더 빛나는 지혜가 있으랴. 그러므로 성서는 진리를 향하는 지혜의 출발을 경외심이라고 정의했다.

오늘 우리는 가상현실을 앞세운 익명의 시대에 욕망의 극대화를 위해, 신과 자연의 신비에 대한 모든 경외심을 외면해 버린 '발가벗은 시대'에 살고 있다. 더 이상 가슴 설레는 신비가 존재 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일체의 의미를 상실한 채 '욕망의 블랙홀'을 향해 돌진해 가고 있다.

오늘도 강화에는 종일토록 비가 내린다. 희미한 물빛 안개가 젖은 산허리를 휘감고, 바다쪽 검은 개펄 위에는 하얀 안개가 밀려가고 있다. 저 사월의 카오스의 바다 같은 물안개 속에서도 푸른 산하를 향하여 영원히 젖지 않고 빛나는 햇살이 눈부신 생명의 빛으로 비추어 오듯. 절망 속에 희망을, 혼돈 속에 질서를, 죽음에 생명을 일깨우며 우리에게 다시 오실 분은 그 어디쯤 와 계시는가?

조광호 신부.인천카톨릭대학 종교미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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