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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이 만난 사람] '내각제 신봉자' 박철언 전 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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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6공 황태자, LP(Little Prince)란 별칭으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 있다. 국회의원(13~15대)과 정무·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낸 박철언(72) 전 의원이다. 5, 6공의 실세였던 그는 북방정책·정계개편 등 국가 운영의 틀을 바꾸는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 헌법을 전공(서울대 법대, 한양대 법학박사)한 율사이기도 한 그는 내각제 신봉자다. 30여 년의 정치 인생에서 세 번이나 내각제 개헌의 밑그림을 그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내각제 구상,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한 3당 합당과 김대중+김종필 연대가 그것이다. 하지만 구상은 모두 빗나갔다. 그는 “지역감정 극복과 통일 한국을 위한 새로운 틀을 만들기 위해 내각제란 큰 꿈을 꿨다가 한 번은 감옥에 가고, 또 한번은 정계은퇴의 고배를 마시게 됐다. 나에게 내각제란 그런 존재였다”고 지난 세월을 회고했다.

 서울 역삼동에서 무료 법률상담소를 열고 있는 박 전 의원을 지난달 29일 오후 만났다. 야당 대표가 “개헌에도 골든타임이 있다”며 개헌을 주장한 날이다. 스스로를 “이상주의 정치를 지향했다 실패하고 빨리 떠난 이상주의자”라고 말한 박 전 의원이 생각하는 개헌의 조건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는 정치인들의 공인 의식과 자질을 첫째 조건으로 꼽았다. “정치인들 스스로 우리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과제를 풀어가는 데 개헌이 꼭 필요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런 믿음을 국민이 같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철언 전 의원은 “개헌을 하기 위해선 정치권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겸허한 공인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인섭 기자]

 -국회에선 개헌 논의에 시동을 걸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대통령의 권한이 위축되고 레임덕이 빨리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전부 개헌에 몰두해 있으면 경제 살리기에 장애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을 것이다. 국회는 경제 살리기뿐 아니라 북핵 등 안보 문제, 나라의 틀을 바꾸는 문제도 병행해 추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야당은 국회선진화법이란 걸로 발목 잡지 말고 경제 살리기 법안 같은 걸 빨리빨리 통과시켜 줘야 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개헌 언급에 청와대가 공개 면박 주는 파열음도 빚어졌는데.

 “발언 시기와 방식은 미흡했지만 집권당 대표가 개헌을 얘기한 건 잘못이 없다고 본다. 다만 오스트리아식 모델이란 구체적 모델을 언급한 건 부적절한 것 아닌가. 지도자가 되려면 말이 무거워야 된다. 말 한 데 대해선 책임져야 하는데 하루도 못 가서 잘못했다고 빠질 바에야 왜 얘기를 하나.”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가 우리에게 맞는다고 보나.

 “오스트리아 헌법은 국민이 대통령을 직선하고 의회에서 총리를 선출하도록 하고 있다. 대통령이 외교·국방을 담당하고 내치(內治)는 총리가 하도록 돼 있지만 실제론 대통령은 형식적 존재이고 사실상 의원내각제처럼 운영되고 있다. 분단국가인 우리 현실에서 대통령이 외교·국방을 맡고 총리가 내치를 맡는다면 장차 통일에 대한 대처가 힘들어진다.”

 -지금 개헌이 필요한가.

 “우리는 네 가지의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계속 발전해야 하는 성장의 문제와 복지사회 건설, 지역·계층·세대·이념 간 갈등을 치유할 국민화합, 그리고 조국통일이다. 네 가지 과제를 풀어가는 데 27년 전에 만든 헌법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권력구조 개편이 된다면 어떤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보나.

 “개인적으론 독일식 의원내각제를 해야 한다고 본다. 독일식은 대통령과 총리가 있지만 총리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하는데 건설적 불신임제를 갖고 있어 후임 총리를 선출하지 않으면 정권을 불신임해서 내쫓을 수 없도록 했다. 또 새로 총리가 바뀐 다음엔 1~2년 안엔 불신임 결의를 할 수 없도록 하는 안전장치를 뒀다. 아데나워·콜·슈뢰더 총리 등이 10년 이상 안정적으로 집권하면서 경제의 기적과 독일 통일을 이룬 것도 이 때문이다.”

 1980년 7년 단임 대통령제로 개헌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5공 말 내각제 개헌을 추진했다. 당시 안기부 특보로 있던 박 전 의원이 내각제 개헌의 초안 작업을 지휘했다. 그의 첫번째 내각제 시도이자 좌절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왜 내각제를 하려 했나.

 “유럽을 많이 가보시더니 통일에 대비하려면 전부, 아니면 전무식으로 여야가 대치해선 안된다, 내각제를 해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때 초안을 다 만들었다. 내가 개헌안을 직접 대통령에게 브리핑했다. 독일식 내각제안을 많이 참고했다. 선거구제도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며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려 했다.”

 -내각제는 당시 여권의 장기집권 플랜이란 의심을 받았다.

 “그렇게 속단할 수 없다. 국민이 투표로 국회의원을 뽑고, 국회에서 총리를 뽑는데 어떻게 장기집권을 하나. 잘하면 오래 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빨리 그만두게 하는 것이 의원내각제다.”

 -정반대로 대통령 직선제가 이뤄졌다. 개헌을 이끈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국민이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과 전두환 시대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반감과 염증을 갖고 있었다. 또 중산층이 양산되면서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대통령제는 직선제가 생명이다. ‘체육관 선거’는 국민이나 야당·시민단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전 대통령은 내각제로 가되 그게 아니더라도 서울올림픽까지는 개헌 논의를 유보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취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6·29 선언이 나오게 됐다.”

 90년의 3당 합당(민정+민주+공화당)은 정치권을 흔들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YS)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JP) 공화당 총재의 결합을 이끈 매개는 내각제 개헌이었다. 7년 뒤 대선 승리를 가져온 DJP(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김종필 자민련 총재) 연대가 가능했던 것도 내각제 개헌 약속이었다. 두 번의 내각제 개헌 파동의 밑그림을 그린 주역도 박 전 의원이었다.

 -왜 내각제에 집착했나.

 “보혁(保革)구도로 가서 안정적 의석을 확보해야 통일에 대비할 수 있다고 봤다. 3당 합당 후 내각제를 해서 한 분은 대통령 하고 한 분이 총리 하면 4~5년 넘어갈 수 있고, 그렇게 한 세대가 넘어가 포스트 3김시대가 되면 젊은 정치인들이 경쟁해서 정치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봤다.”

 -내각제 때문에 YS와 결별하고 구속되는 정치적 시련을 겪었는데 후회하진 않나.

 “90년 2월 김현철씨 집에서 YS를 만났는데 ‘박 장관, 내각제는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이번에 내가 하고 다음에 민정계, 박 장관이 (대통령)하면 좋은 것 아니냐. 내가 박 장관 밀어주겠다’고 하더라. 난 깜짝 놀라서 ‘무슨 말이냐. 내각제를 이념적 기초로 해서 통일에 대비하고 국민을 위하자고 한 것이지 나눠먹기 위해 한 건 아니지 않느냐.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다. 그러자 YS가 ‘박 장관은 되지도 않을 일을 하자고 하면 되느냐’고 호통을 쳤다. …나중엔 김옥숙 여사와 노 대통령까지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다 YS 뜻대로 하라고 했지만 끝까지 반대했다.”

 -정치적 욕심 때문은 아니었나.

 “욕심이 있었다면 오히려 YS와 같이했어야지. YS 하고 다음엔 나를 밀어주겠다고 하는 와중인데 내각제가 나한테 유리하다고? 천만에 반대죠.”

 -DJP의 내각제 약속도 깨졌다.

 “YS의 배신과 DJ의 약속 위반은 다르다. YS는 할 수 있는데 안 했고, DJ는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을 합쳐도 (개헌선인)국회 의석의 3분의 2가 안 됐다.”

 -소회는.

 “내각제 해야 한다고 했다가 대통령이 안 한다고 하면 다 안 하는 방향으로 가버리더라. 정치인들의 권력지향성 때문인데… 권력이 내게 안 맞아서 일찍 정치를 떠났는지 모른다(58세 때인 2000년에 정치를 떠났다). 난 이상주의자였다.”

 -스스로 어떤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하나.

 “기획정치·이상주의 정치를 지향했는데 실패하고 빨리 떠났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소신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큰 보람은 북방정책의 토대를 닦은 것이다. 북방정책으로 안보환경, 통일 여건이 좋아진 것 아닌가. 그건 후회 없는 보람이고, 그런 기회를 준 현대사에 고맙게 생각한다.”

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jmlee@joongang.co.kr

[S BOX] 1995년 등단한 시인 … 올해 세 번째 시집 내

박철언 전 의원의 명함엔 ‘변호사·시인·법학박사’라고 씌어 있다. 경북고 시절 ‘청맥’이란 교내 문학동호인회에서 활동했던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1995년 월간 순수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요즘도 이른 새벽에 시(詩) 쓰는 일을 즐긴다고 한다. 시집 『작은 등불 하나』 『따뜻한 동행을 위한 기도』에 이어 올해 세 번째 시집 『바람이 잠들면 말하리라』(순수문학)를 냈다.

 “사랑하는 일이 가슴 아픈 일일지라도/멈출 수 없으리/상처받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가을바람 불면 그 바람 온몸으로 맞고/바람이 잠들면/일어나 가던 길 다시 가리라/계절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면/언제 흔들려 내공을 쌓으랴…(중략)…지금 여문 것은/한때 긴 고통의 강을 건너온 것이라고/바람이 잠들면 말하리라.”

 그에게 ‘가지 않은 길’은 뭔지 물었더니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고 싶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주변에서 법대를 가야 한다. 법대 왔으면 고시를 해야 한다고 해 하다 보니 법조의 길로 들어섰다”고 덧붙였다.

 87년 대통령 직선제 등을 담은 6·29 선언의 초안을 작성한 박 전 의원은 대학 시절엔 한·일 수교협상에 반대하는 6·3 사태 학생선언문의 초안 작성을 주도했다. 법대 동기이자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정정길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선거기획 참모를 맡은 게 인연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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