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일본인에 대한 예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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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움베르토 에코의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이 번역 출간된 해가 1986년이니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일본의 서양 고전학자 다니구치 이사무(谷口勇) 교수라는 분이 어느 잡지 기고문에 '벌써 한국어판이 나왔고 심지어 러시아어판까지 나왔는데…'라고 쓴 적이 있다. 말의 결로 미루어 나는 그가 그때까지 일본어판을 내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출판계에 섭섭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유럽 책이 일본보다 한국에서 먼저 번역 출간되는 일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역자인 나는 통쾌하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했다.

초판이 출간된 직후 나는 다니구치 교수의 편지를 받았다. 출판사가 받아 내게 중계해 준 편지였다. 봉투를 열어 보고는 매우 놀랐다. 단정한 한글을 또박또박 박아 쓴 편지였다. 서양 고전학자는 적어도 5개 언어에 익숙해야 하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니구치 교수가 한국어까지 쓰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일본 에코 학회(Japanese Eco Society)' 해외 회원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인인 내가 어째서 일본 학회에, 그것도 해외 회원으로 참가해야 하는가? 해외 회원 같은 소리하네.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그의 초대를 묵살했다. 별로 미안하지도 않았다. 일본인인데 뭐.

94년 미국에서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개역(改譯)하고 있던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볼일로 서울에 들어오는 길에 도쿄의 서점에 들렀더니 이 난해한 두 권의 소설을 해설한 유럽과 미국 가이드북(안내서)의 일본어 번역본이 여러 권 나와 있었다. 몇 권 사서 가방에 넣었다. 뒷날 역자 이름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이 다니구치 교수가 번역한 책이었다. 그가 번역한 책을 길잡이로 삼은 덕분에 나는 어렵기로 악명 높은 두 소설 속의 수수께끼들을 상당수 풀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그에게 빚을 진 셈이다. 그래서 나는 '푸코의 진자' 역자 후기에다 썼다. 뒷날 그렇게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면서도 다니구치 교수의 초대를 침묵으로 거절한 무례를 사죄하고, 멀지 않은 장래에 그를 만나 나의 공명정대하지 못한 처신을 사과하겠노라고 썼다. 그러고는 몇 차례 일본인에게 무례하게 군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 상대가 일본인이라면 한국인은 좀 무례하게 굴어도 좋다는 통념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한다고 덧붙였다.

해마다 한식날 어름이면 휴가를 내 우리 집으로 오는 일본인 친구가 있다. 20년 넘게 계속된 일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어느 날 나에게, 나의 친구 중 누구누구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네 친구이기 이전에 벌써 그 '누구누구'의 친구다, 네가 무슨 권리로 내 친구들을 선별해? 일본인 친구가 설명했다. 무례하다는 것, 무차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잘 모르는 문제(주로 외교)를 두고 조목조목 인신공격에 가까운 무례를 범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의중을 짐작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좀 무례하게 굴어도 좋은가?

선배 중에, 미국인과 결혼해 두 아들까지 둔 분이 있다. 선배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미국놈, 미국놈들'했더니 선배가 그랬다. 자네, 말버릇 좀 고치게. '미국년'과 결혼한 내가 불편해.

형님의 딸인 나의 질녀(姪女), 요즘 말로 조카딸은 일본인과 결혼했다. 질녀 부부는,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일본에서 어린 딸과 함께 귀국하고는 한다. 우리 가족은 형님 앞에서 '일본놈' '왜놈' '쪽발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쓴다. 애를 쓰다 보니 좀 나아졌다. 철학자 제논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페리클레스(고대 그리스 정치가)의 행동거지가 너무 반듯한 것을 두고 인기를 끌기 위해 위선을 떤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철학자 제논이 그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도 따라해 보게. 모르는 사이에 고상해질 테니까'.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약력=장편소설 '하늘의 문', 소설집 '노래의 날개', 역서 '장미의 이름' 등 다수. 동인문학상(1998), 대산문학상(2000). 명예 문학박사(순천향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