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375)|제76화 화맥인맥 월전 장우성|「백두산 천지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벽화를 그리기 위해 일본에서 사가지고 온 마지에 우리나라 순닥지를 붙여 세번 배정해서 쇠가죽 같은 화선지를 만들었다. 거기에다 아교와 백반을 섞어 서너번씩 포수했다.
이렇게 해야만 석채를 발라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벽화를 그릴 때는 내가 홍익대에 출강할 때여서 대학의 교실 한칸을 빌어 제작했다.
베니어판에 종이를 붙이고 받침대를 만들어 고정시켜 세워 놓았다.
화판이 워낙 크기 때문에 올라가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호)도 짜야했다.
여름방학동안 꼬박 작품제작에 매달려 5개월만에 완성했다.
작품을 완성해 놓고 국회로 가져가기 전에 각계인사를 초청, 품평회(?)를 열었다.
홍익대 제작현장에서 이른바「쫑(종)파티」를 겸해 연 품평회에는 각계인사가 많이 모였다.
특히 백두산을 탐승한 일이 있는 이관구 유홍렬 유달영씨가 자리를 같이 했기 때문에 『고칠 점이 없느냐』고 물었다.
미술계에서도 운보(김기창) 도상봉 이대원 이종무화백등이 참석했다.
예술원쪽에서도 월탄(박종화) 서항석 이헌구 시암(배길기)등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언론계에서 이환의씨도 참석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교통사고로 기프스하고 목발을 짚고 다니던 신용호 교육보험회장이 머리를 짧게 깎고 와 여러사람에게 치하받던 일이다.
그날 따라 날이 몹시 더워서 참석자들이 모두 땀을 뻘뻘 흘렸다.
작품을 완성해 놓고 화판을 다시짰다.
영구보존할 작품이어서 바싹 마른 좋은 나무로 프레임을 만들어 먼저 국회의사당에 보냈다.
길이가 21자나 되는 대작이어서 완전히 표구해서는 운반하기가 어려워 화판부터 만들어 걸 자리에 놓고 제작현장에서 그림을 떼어 가지고 가 붙였다.
액자도 21자나 되는 긴 나무가 없어 수입원목을 인천에서 제재, 영등포공장에서 1주일이나 쪄서 만들었다.
행여 저벽에서 습기가 생길까봐 벽자체를 특수가공, 방습제를 바르고 비닐을 깔았다. 그 위에 베니어판을 덧대고 액자를 걸었다.
그림이 너무 무거워 나무못으로 벽에 고정하고 굵은 구멍을 여러개 뚫어 놋쇠로 나사못을 만들어 죄어 박았다.
『백두산천지도』는 표구며 액자제작등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동산방 박주환 사장이 맡아서 애써 주었다.
액자에 그림을 붙여 의사당벽에 걸어 놓고 보니 유리가 문제였다.
한국유리에 부탁하니 아무리 길게 만들어도 12자까지 밖에 뺄 수 없다고 해 일본에서 들여올 요량으로 알아봤지만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유리대신 맑은 비닐을 덮어 쒸울 수 밖에 없었다.
국회의사당에 그림을 건지 한참 후에야 그림값을 받았다.
작품을 제작하기도 전에 그림값 가지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도 점쟎지 못한 일이어서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더니 작품제작중에 국회의사당 정 건설국장이 예산을 세워야한다고 의논을 하자고 해서 정 국장방에 간 일이 있다.
정 국장이 그림값을 묻기에 『호수로 따지자면 2천호가 넘을 뿐 아니라 심혈을 경주해 그려야 할 그림인만큼 화료도 상당히 책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얼마면 되겠느냐』고 되물어 『3천만원은 받아야겠다』고 했더니 정국장은 깜짝 놀랐다. 국회예산이 8백만원밖에 없다고 사정해서 어차피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인데 그림값 타박을 하고 싶지 않아 1천만원에 하기로 결정했다.
그림값 이야기가 나자 신문들이 얼마만한 크기로 어떻게 그린 그림인줄도 모르면서「덮어놓고 열넉냥금이라고」웬 그림이 한폭에 1천만원씩이나 하느냐고 가십을 썼다.
그림값은 돈을 받을 때 또 한번 말썽을 빚었다. 국회사무처가 세금을 제하겠다고 해서 그때 화가들은 면세대상이라 이의를 제시했더니 그대로 해주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