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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낙방의 오기와 취미로 부른 노래가 엉뚱한 길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고문에 패스, 진사(?)벼슬이라도 해야할 것 아니냐는 아버님의 뜻을 따라 54년서울대법대에 진학했다.
나로선 법대보다 상대를 택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기가 어려웠다.
웬 휴강이 그리 잦았던지. 전후의 어수선한 분위기속에 대학신입생들은 음악다실에서 낭만을 찾았다.
옛 서울대문리대 앞「별장」다방. 최신 팝송을 들으며 프레시맨시절을 보내다보니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는 됐다.
워낙 목소리가 허스키라서 목소리가 아름다워야 가수가 되는 것으로 알덩 그때 가수가 된다는 건 꿈도 못꿨고, 법관이 되겠다는 법대생이 「딴따라」라니 상상도 못하돈 당시 이미 「가수에의 운명」은 시작됐던 셈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콧노래라도 흥얼 거리면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고 장기자랑 때면 노래를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법대생들이 하는대로 고시공부를 시작, 3학년 때 첫번 응시를 했다.
낙방, 그때까지 공부나 시험이라면 자신만만 했던 나에게 첫 낙방은 엉뚱한 오기를 불러 일으켰다.
『내가 떨어지는 시험이라면 시험이 잘못됐거나 문제가 있다.』이 시련이 법복과 가수의 갈림길이었던가 보다.
4학년 봄 서울대단과대학 대학장기대회가 열렸다. 법대대표로 나가 노래를 불러 입상했다. 고시를 거부하고 졸업을 하고나니 할일이 없었다.
친구들이 미8군쇼에 가서 노래를 부르면 돈을 많이 받는다면서 출연을 권했다. 소개를 받아 테스트끝에 생각잖은 8군쇼 무대에 서게됐다. 『조금만 하고 그만 두어야지…』했던 것인데 얼마후 작곡가 손석우선생으로부터 곡을 받아 취입을 하게 됐다. 『우리애인은 올드미스』등 4곡. 예기잖은 큰 히트를 했다.
「대기만성형의 학사가수」. 학사가수가 드물던 때 신문에 대대적인 보도도 됐다. 갑자기유명인이 되고 말았는데 신문에 난 사진 때문에 그때까지 아버지에게 숨기고 있던 「가수개업」이 들통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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