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지역병, 난치인가 불치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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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나이 이르는 곳 그곳이 다 고향인 것을(男兒到處是故鄕)." 만해 한용운 스님이 1917년 겨울 오세암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어 읊은 오도송(悟道頌)의 첫 구절이다. 필자가 과거 공직에서 지방의 기관장으로 부임할 때 취임사에서 즐겨 인용하던 글귀다. 본래의 심오한 뜻과는 무관하게, 필자 나름대로는 새로운 임지가 어디든 그 지역을 고향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표현한 것이었다.

또다시 무슨 선거가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정부가 새삼스레 특정지역의 민심 추스르기에 나서고, 어느 지역에 신당이 태동할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 어느 지역 정치인들이 소속 정당을 재고하면서 술렁이고 있다는 풍문이다. 서서히 지역감정의 고질병이 다시 도질 조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지역 문제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손바닥만한 나라에 종족이나 피부 색깔이나 종교가 지역에 따라 다르지도 않다. 다만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태어났는가라는 극히 우발적이고 비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것이 평생을 두고 꼬리표처럼 붙어다닌다. 같은 지방 사람들 간에 자연스레 느끼는 친근감이나 향토애의 범위를 넘어 끼리끼리 폐쇄적으로 살면서 타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는 질시와 증오까지 서슴지 않는다.

과거에도 우리 역사에 지역감정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특히 1960년대 이후 여야 정치인들이 득표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를 부추긴 탓에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투표에서 지역별 싹쓸이 현상이 다반사가 되고, 표를 몰아주었는데도 우리 지역을 이렇게 푸대접할 수 있느냐며 흥분하는 모습도 자주 본다. 인사카드에 출신지역 기재란이 없어진 지가 언젠데 걸핏하면 고위 공직자의 출신지역별 통계 숫자를 보도하는 등 언론도 톡톡히 한몫을 했다.

지역 대립의 조합도 다양해졌다. 당초의 영호남 대립에서 충청권이 참전을 선언하고, 수도권과 지방이 반목하더니 심지어 서울의 강남북까지 갈등 조짐을 보이는 등 혼전 양상이다. 국제적 무한경쟁의 시대에 이런 일로 국력을 낭비할 시간이 어디에 있는가.

물론 지금까지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조야(朝野)의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골수에 이른 지역병을 뿌리뽑기에는 정성과 항심(恒心)이 모자랐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지역감정 해소의 제1차적 책임은 당초 원인을 제공한 정치의 몫이다. 모든 정치지도자는 지역감정에 의지하려는 생각을 끊어버려야 한다. 자신에게 표를 찍은 사람이나 찍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아량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코드나 친소(親疏) 관계만을 따져 사람들을 편중되게 쓰다 보면 소외된 지역에서는 당연히 민심이 흉흉해지게 마련이고, 이에 놀라 너무 작위적으로 이것을 시정하려 들면 흔히 역차별 정서로 번진다. 대통령을 배출한 지역에서는 제일 큰 것을 차지했으니 그 밖의 것은 다른 이들에게 좀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것이 통합의 정치다.

지역의 균형발전은 참으로 긴요한 과제다. 그러나 그것은 각 지역에 맞는 일을 새로이 창출해 내는 생산적인 방법이어야 한다. 중앙의 주요 기관들을 무 자르듯 잘라내 지방으로 떼주는 식의 산술적 방법은 근본적 해결책이 못될 뿐 아니라 이것 역시 또 다른 지역감정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요컨대 위정자들이 당장의 이해관계를 떠나 지역 문제에 대한 역사의식과 사명감을 가져야만 한다.

물론 지역 문제의 책임을 정치인에게만 돌릴 일이 아니다. 모든 국민과 공직자와 시민단체들이 함께 떨치고 나서 일대 범국민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지역 간에 서로 섞여 일하고 서로 섞여 놀자. 서로 방문하고 서로 결연하고 서로 통혼(通婚)하자. 서로 바꾸어 입후보하고 서로 바꾸어 투표하자. 인기가수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라는 좋은 노래가 있지 않은가.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아랫말 하동사람 윗말 구례사람/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오시면 모두모두 이웃사촌/고운 정 미운 정 주고받는/경상도와 전라도의 화개장터…."

이런 마음이 쌓여 서로의 동질성이 확인되고 마침내 굳게 잠긴 지역의 빗장이 풀어지는 것이다. 이 과업은 반드시 우리 세대가 완수해야 하고 다음 세대까지 절대로 물려줘서는 안 된다. 고질적인 지역병을 치료할 줄기세포 연구는 언제쯤 완성될 것인가.

김경한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