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면식범의 ″원한살인〃가능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한낮에 혼자 집을 지키던 주부가 손발이 묶이고 목이 졸린 피살체로 발견됐다. 19일하오4시쯤 파이로트 만년필 메이커인 신화사전무 이훈용씨(48·서울정릉4동266의162)집 1층 공부방에서 이씨의 부인 장한영씨(44)가 붕대와 넥타이로 목이 졸리고 손과 발이 붕대로 묶인 채 숨져 있는 것을 학교에서 돌아온 이씨의 장남 해원군 (K중1년) 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범인들이 값진 귀중품을 그대로 둔 채 2층 안방에서 넥타이핀 1개와 은도금 반지 등 4만여 원어치만 털어 간 사실을 밝혀내고 강도살인을 위장한 면식범들의 원한살인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고 청수 파출소에 수사본부(본부장 김종일 성북경찰서장)를 설치, 수사중이다.
해원군에 따르면 학교에서 돌아와 초인종을 눌렀으나 인기척이 없어 담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머니 장씨가 누나 유미양(15·고려중 3년)의 공부방에 반듯이 누워 머리를 창문 쪽으로 향한 채 숨져 있었다는 것.
장씨의 목은 붕대로 두 번 감기고 다시 넥타이로 졸려 있었으며 손과 발도 앞으로 모아진 채 붕대로 묶여 있었다.
또 장씨의 입과 코·눈엔 의료용 대형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
장씨는 목을 조를 때 생긴 색흔만 남아있을 뿐 의상이나 반항의 흔적은 없었다.

<현장>
1층 응접실 탁자엔 코피잔 3개가 그대로 놓여져 있었으나 2개에만 코피가 부어진 채 입을 댄 흔적이 없었고 1개는 코피가루만 남아 있었다.
코피포트의 코드는 소키트에 꽂혀있지 않았고 응접실에 있는 소니 전축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2층 내실의 소형장롱 문이 열린 채 어지럽혀져 있었다.
범인들은 2층 안방 장롱을 뒤져 은도금 넥타이핀 1개와 커프스버튼 2개·액세서리 은도금반지·진주 커프스버튼·여자용 세무지갑·목걸이 1개 등 4만여원 어치를 털어 달아났다. 장롱 바로 옆 문갑 속에 들어있던 2개의 롤렉스시계 등 시계3개·캐논카메라 3대 등과 현금이 들어 있을 만한 곳은 뒤지지 않았다.
다만 안방 화장대와 장남의 방 상패 함, 책가방 등과 카세트 녹음기에만 손댄 흔적이 있었다.

<목격자>
숨진 장씨는 이날 상오 자신이 집사로 있는 정릉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상오11시30분쯤 돌아왔다.
장씨는 낮12시30분쯤 이웃 이모씨(41)집을 찾아가 이씨의 부인과 40여분 동안 자녀문제 등을 이야기하다 정화조 청소차 소리를 듣고 담을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장씨 집 정화조 청소를 했던 최기태씨(39·서울 석관동 125의 12·한일정화조직원)는 20여분 동안 정원에 있는 정화조 청소를 마치고 1만2천원을 장씨로부터 받아 하오1시30분쯤 돌아갔다.
최씨는 초인종을 눌렀을 때 장씨가 문을 열어주었다고 말했다.
장씨 집 대문 맞은편 집에 사는 금완숙씨(26·여)는 하오 1시50분쯤 개 짖는 소리가 들려 밖을 내다보니 회색양복을 입은 40대 남자가 장씨 집 문밖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장씨의 언니는 이날 하오 3시쯤 장씨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중이어서 끊었다고 말했다.

<수사>
현장을 감식한 경찰은 찻 쟁반에서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 2개를 채취했을 뿐 범인의 유류품이나 족적을 찾는데 실패했다.
경찰이 이 사건을 면식범의 계획적 살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은 ▲장씨가 문을 열어 범인을 집안으로 맞아들인 점 (발견당시 대문이 안으로 잠겨있었다) ▲좀처럼 코피대접을 않는 장씨가 코피를 내놓았으며 그것도 귀한 손님이 올 때만 쓰는 일본제 코피세트와 코피(얼마전 남편이 일본인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것임)를 사용한 점 ▲피해 품이 있었으나 현금이 들어있을 곳이나 값진 물건을 손대지 않았고 ▲범인이 2∼3명으로 추정되나 살해되기 직전까지 반항한 흔적이 없는 점 때문이다. 경찰은 지난 80년 10월말 남편 이씨가 신도리코 회사에서 파이로트 회사로 옮긴 뒤 8개월만에 파이로트의 전직 간부 7명이 거액을 갈취한 혐의로 구속되어 그로 인해 이씨가 직책상 오해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또 최근 직장에서 직원들이 집단사표를 내는 등 회사인사관리에 불만이 있었던 것을 알려져 이점에 대해서 수사중이다.
경찰은 한달 전쯤 통장 오재호씨(41)가 동네새마을 사업에 협조해 달라고 하자 장씨가 『요즘 우리가정에 복잡한 일이 생겼다』고 말했던 점도 이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나 보고 수사중이다.
그러나 이씨는 『원한 살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경찰은 이 사건이 단순강도일 경우 장씨가 이날 아침 자기 집 대문밖에『정원 일하는 최 아저씨 들려 주셔요』라고 써 붙인 종이 쪽지가 범인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범인들이 쪽지를 보고 이씨 집에 단골인 정원사 최씨가 보내서 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은 『이날 하오3시쯤 약10분 동안 전화를 걸었으나 계속 통화중이었다』는 장씨 언니의 진술에 따라 범행시간을 이날 하오3시10분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장씨가 발견당시 체온이 남아있던 점에 비춰 이날 하오3시30분쯤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20일 낮12시부터 장씨가 피살된 유미양의 방에서 서울지검 천기흥 검사의 지휘로 시체부검을 실시했다.
부검을 마친 후 천 검사는 『보통 타살의 경우 부검이 별 의미가 없지만 이번 사건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천 검사는 부검결과 목 부분에 살갗이 벗겨지고 피하출혈 흔적이 있어 일단 장씨가 목이 졸려 숨진 것으로 판단되나 조직검사 등 정밀 검사의 결과가 나와야만 확실한 사인이 규명될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주변>
16년 전에 결혼해 1남1녀를 둔 장씨 부부는 9년 전 현재의 대지 1백평·건평 60평의 집으로 이사온 뒤 가정부 없이 검소하게 살아왔다.
장씨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이웃엔 말다툼 한번 안 하는 단란한 가정으로 알려져 있다.
장씨는 분재에 특별한 취미를 가져 응접실 옆에 온실을 만들어 화초를 재배해 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