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안하고 사는 게 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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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고향인 작은 도시 P시에 볼일로 잠시 다니러 갔던 때, 한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 개업한지 며칠 안된 친구의 식당을 찾아갔다.
「비빔밤, 칼국수, 라면…」유리창에 쓰여진 글씨를 훑어보며 조그마한 친구네 식당 문을 여는 순간의 마음은 용한 점장이를 찾아가는 때처럼 약간 긴장되고 두근대는 것이었다.
법석대던 점심시간을 정신없이 치르고 설것이도 말끔히 끝낸 뒤, 홀 바닥에 번진 물기를 닦아내며 풋풋한 웃음으로 나를 맞는 친구는 70kg의 거구가 몰라보게 날씬해져 있었다.
조그마한 방 하나와 서너 개의 역시 조그마한 테이블들, 시늉만으로 가리어진 주방을 다 합해서 너댓평이 될까말까한 소꼽살이 같은 식당에, 친구의 손을 거쳐간 남비나 주전자는 새것보다 더 빛을 내며 걸려 있었고, 맑은 물에 헹궈 내어 선반에 옆에 둔 그릇에서는 정갈함이 똑똑 듣고 있었다.
10여 년을 혼자 적적하게 살면서 수없이 망설이고, 우려하고, 단념하던 일을 가장 초라한 것에서 뛰어들어 시작하고 나니 생각과는 달리 하루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새로운 각도에서 인생에 가능성과 보람이 생긴다고 말하며 친구는 아주 시원스럽게 웃어주는 것이다.
40여 년 동안 학교 다니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그리고 혼자되어 살면서 위축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쓰며 꼿꼿이 지내고자 했던 고장에서 비빔밥 담은 쟁반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배달을 갔다와도 즐겁기만 하단다.
『살 빼는 약 먹으면 1년에 겨우 1kg이 주는데 나 열흘만에 6kg줄었다』면서 우선 약값 번 것도 수입이 된다 해서 나도 따라 웃었다.
『오늘 낮엔 우리 오빠 부하직원이 점심 먹으러 왔는데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나가면서 내 엉덩이를 툭 치고 나가잖아. 나중 내가 누군지 알고 나서 그 사람 날 부끄러워 어떻게 대할까 몰라.』그래서 우린 또 웃었다.
이 친구가 만들어 주는 깔끔하고 감칠맛 있는 음식을 먹으며, 만나자마자 이렇듯 계속 즐거운 웃음을 웃게 해주는 싱그러운 성품을 접하고 살면 한결 마음이 젊어지고 사는 보람도 있을 것 같아 하직인사를 나누기가 몹시도 아쉬웠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도 친구가 하던 말이 자꾸 귀에서 맴돈다.
『10여 년 공상하고 속썩인 세월이 아까워 죽겠어. 천한 일 열심히 하는 것 보다 아무 것도 안하고 사는 게 얼마나 더 죄가 되는 지도 모르고 말이야.』
생각이나 계획보다 실천이 약한 내게 따끔하게 가르쳐 준 친구의 산 교훈을 얻고 온 보람 있는 걸음이었다. <대구시 수성구 시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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