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 백년의 주역들』(15)|「양담배」서「성냥」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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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문호개방이후 물밀듯 밀려온 서양 문물은 오랫동안 외부세계와 단절 된 채 살아온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래서 당시사람들은 바다 건너로부터 온 새로운 문물에「양」자를 붙여 불렀고 양자가 붙은 것은 거의가「크고 질 좋고 신기한」것들이었다. 1883년 민영익을 따라 보빙사 일행 의 한 사람으로 미국에 갔던 유길준 은 임무가 끝나자 그대로 미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미국생활을 시작하기 앞서 그때까지 입고 있던 한복을 벗어 던지고 양복차림이 됐다.
그러니까 유길준 은 최초의 미국유학생이자, 최초의 양복 착용 자였던 셈이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양복점이 생긴 것은 1889년.「하마따」 (빈전)라는 일인이 종로 복청교 부근에 양복점을 열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양복을 입기 시작한 것은 1896년 관복개정이후. 뒤이어 단 오령이 내려져『상투 없이 한복을 입을 수 없게 됨으로써』비단 관리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양복착용이 늘어갔다.
이와 함께 구미 각 국에 상주공관이 설치, 외교관으로 근무하다가 귀국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예복스타일의 정장양복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여자들도 야회복 스타일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순수양장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식생활에 있어서도 변화가 왔다. 개항 초기 인천·부산 등의 개항장에 와있던 외국인들이 설탕·밀가루·유제품을 들여와 소개했고, 1890년께 에는 서울의 외 교가를 통해 코피와 홍차가 왕실에 소개돼 그 뒤로 왕실과 상류층에서 애용했다.
이 무렵 선교사들을 통해 케이크·빵·양과자 등이 전해졌고, 1895년 이후 당시 외교가 의 중요한 사교모임이던 정동클럽에서는 서양식 요리가 제공됐다.
최초의 본격적인 양옥은 1884년 인천에 세워진 독일계 상사 세창양행의 사택. 별장 식 건물로 부분2층, 그리고 건평이 1백73평이나 되는 벽돌저택이었다.
서울의 경우는 배재 학당 강당이 처음이다.
이때 도편수로서 공사를 맡은 사람은 목수 심의석으로 그는 여기서 얻은 경험으로 후에 이화학당의 메인 홀·독립문·도지부청사 등 우리나라 근대건축사에 기록될 기념비적 건물의 공사를 맡았다.
양식건축과 함께 스팀 식 난방법이 도입됐다. 당시 일반에서는 물을 끓여 증기를 내 뿜 토록 된 방에서 지내면 남녀의 양·음기를 죽인다는 소문이 돌아 인부들은 건물 지하의 보일러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려하지 않았다. 또 후에 이화학당이「손 탁」호텔을 사들여 기숙사로 썼을 때 처녀가 온돌 아닌 마룻방에서 스팀을 쐬고 살면 애를 가질 수 없다는 소문이 나 사회문제 (?) 가 되기도 했다.
당시 수입된 외국상품은 석유에서부터 화학염료·함석·술·유리·성냥, 그리고 바늘에 이르기까지 극히 다양했다. 그 중 에서 수위는 역시 면제품. 1886년부터 98년까지 총 수입액의 절반이상이 면제품이 차지했다.
처음엔 미국제 면제품이 일본을 통해 수입, 영국 제 면제품을 누르고 국내시장을 석권했으나, 후에 질이 나쁘지만 가격이 저렴한 일본제가 대량으로 등장하고서는 일본 상품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석유는 이미 1880년 초부터 들어와 지금까지 식물성 기름에 의존하던 광열계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당시 미국의 스탠더드오일은 필라델피아유전에서 대규모로 석유를 채굴, 그 판로를 동양에서 구했다.
그들은 당시 인천에 와있던 타운센드 상사에 독점 판매권을 주고 인천 월미도와 부산에 6만 초롱을 저장하는 대규모 저장시설을 설치,「솔 표 석유」라는 상품명으로 한국시장에 파고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석유의 정체에 대해『석유는 바다에서 캐온다』『석탄을 삶아 걸려낸다』는 등 설이 분분했다. 석유등잔은 색깔이 붉고 냄새가 심한 등 결점이 있었으나, 1홉으로 10일 밤을 껼 수 있고 불이 밝아 일반으로부터 인기를 모았다.
석유는 처음부터 미국세가 만연 우세. 그 후 값싼 러시아· 일본석유가 들어왔으나 그을음이 많아 인기를 끌지 못하고 스탠더드의 솔 표가 오랫동안 독주를 계속했다.
이처럼 나라 전체가 너도나도 석유에만 매달리자, 뜻 있는 사람들은 외국상품에 대한 맹종을 비판하고 나섰다. 매 천 황 현은『이제 산야에는 기름 짜는 열매를 심지 않고 나라전체가 석유 아니면 등을 켤 수 없게 됐다. 이는 양면이 나온 뒤 면화농사를 짓지 않고 양철이 나온 뒤 국내 철 생산이 줄어든 것과 같은 이치』(『매 천 야 녹』)라고 비판했다.
담배는 1885년부터 미국산 지 권 연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가장 인기 있던 담배는 히어로 (영웅) 로 값은 한 갑에 4전, 그밖에 리리·체리·골드 등이 있었다.
영화도입은 1900년께. 1903년 6월 23일자「황성신문」광고 난에는『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 에서 활동사진을 시술』하는데, 내용은『구미 각 국의 생명, 도시의 절승 한 광경』으로『허 입 요금 십 전』이라는 광고가 나와있다.
당시 영화의 수준이래야 사진의 복제에 불과한 기록영화로, 미국에서 제작된『뉴욕의 대 화재』『잔다르크의 대화형』『나이아가라』등이 일반의 인기를 모았다.
상수도는 콜레라등 수인성 전염병 예방을 위해 오래 전부터 그 필요성이 인정돼왔으나 재정문제로 시작하지 못하다가 l903년 한성전기회사의「콜브란」과「보스트위크」가 서울상수도 부설권을 따냄으로써 시작됐다.
그 후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지체됐으나 1908년 8월 준공, 드디어 급수를 시작했다. 이는 한국최초의 상수도로 급수 대상은 12만 명, 급수 량은 1일 1인당 4입 방 척(1백10산ℓ)이었다.
사진은 1871년 신미양요때 강화도에 상륙한 미 해군 사진반이 촬영한 전투 기록이 처음이었으나 본격적인 도임은 한미수교이후. 1884년 민영익을 따라 내한한 미국인「퍼시별·로월」은 약6개월 간 한국에 머무르면서 당시의 풍물을 촬영, 후에 자신의 한국체류기인『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1886년 보스턴에서 출간) 에 수록했는데, 이는 한국에 관한 사진이 수록된 최초의 책이었다.
1885년 무렵 서울에서 퍼지던 사진에 관한 일화 한가지. 당시 서울에는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잡다가 가마솥에 넣고 삶아 가루를 내 그 가루로「마법장자」 (사진기) 의약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다.『사람 가루를 써야 사람모습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선교사들이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는 것 을 의심한데서 나온 소문이었다.
1901년 내한한 미국인 선교사로 후에 YMCA의 초대총무가 된「필립· L· 질레트」는 1905년 기독청년회원들에게 야구 (당시는 타구로 부름)를 지도, 다음해 12월 YMCA팀 대 덕어학교팀 사이에 최초의 시합을 가졌는데 이것이 야구 도입의 시초였다.<정자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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