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식차만 확인한 2시간 회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20일 정상회담 직후 정우성 대통령 외교보좌관은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와 역사를 보는 인식에 있어 노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 사이에 어떤 의견 차이 같은 게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상회담 두 시간 중 1시간50분 동안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 교과서 문제 등 '역사 인식'에 관련된 대화가 오갔지만 뚜렷한 시각차를 노출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도 회담 직후 회견에서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화했다"며 "일부 공감대가 있었지만 어떤 합의에 이른 것은 없다"고 토로했다. 한.일 관계의 냉기가 가시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분석이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양국 외교장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상회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춘식 기자

◆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의 신사 참배에 대해 '전쟁 미화나 정당화가 아니라 본의 아니게 참전한 희생자의 추도가 목적'이라는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또 "전후 60년간 일본이 비핵화 원칙이나 방위 문제에서 주변 국가들에 위협을 준 적이 없고 군사력을 억제해가며 경제 발전을 추구해 왔다"며 평화지향적 정책을 써왔다는 설명을 덧붙였다고 정 보좌관은 전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야스쿠니 신사에 가 보면 과거의 전쟁을 자랑스러워 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전시해 놓고 있다는 말도 듣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과거의 전쟁과 전쟁 영웅을 미화하고, 이런 것을 배운 나라가 이웃에 있을 때, 특히 이런 나라가 막강한 경제.군사력을 갖고 있을 때, 그 나라로부터 여러 번 괴롭힘을 당한 인근 나라의 국민은 미래를 불안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검인정 문제=노 대통령은 이날 후쇼샤(扶桑社) 교과서의 채택률에 관심을 표명했다. 노 대통령은 "2001년에도 교과서 문제가 있었는데 상황이 심각했다"며 "그때는 채택률이 대단히 낮아 그냥 넘어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자민당의 핵심 세력이 후쇼샤 교과서 채택을 지원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일본 정부는 '검인정 교과서 제도에 개입할 수 없고, 저자의 자유'라고 많이 얘기하는 데 이런 것을 우리 국민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 "일본의 일부 문제 역사 교과서를 읽고 자라나는 세대들이 어떤 관념을 형성하고 가치관을 갖게 되느냐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거듭 지적했다.

◆ 진정한 양국 관계의 미래=고이즈미 총리는 "나라와 나라 간에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다"며 "이런 나라 간에는 전체를 보면서 우호 관계를 발전시키고, 교류 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장기적 해결 자세가 필요하지 않으냐"고 언급했다.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해 "그것만으로는 미래의 진정한 평화가 보장된다고 하기 어렵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미래의 평화를 위한 외교적.정치적 틀을 제도화해야 하고, 다음에 양국 사이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고 화해를 이룰 수 있는 조치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 다음에 경제.사회.문화 교류와 협력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교류 협력만으로는 미래의 확고한 평화를 이루기 어렵고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더 나아가 노 대통령은 "총리와 자주 만나 사진도 찍고 양국 협력 방안을 논의하지만 역사 인식의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앞으로 한.일 간에 조그마한 계기가 있어도 폭발할 소지가 있고 상호 불신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 같은 결단력 있는 지도자가 있을 때 한.중.일 관계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지도자들이 미래의 동북아 질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날의 동북아를 보면 전선이 있었다"며 "마음속의 이런 대결 전선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진정한 미래의 평화를 달성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대결 전선을 없애기 위해서는 역사의 찌꺼기를 없애야 한다"며 거듭 일본 측의 역사 인식 개선을 촉구했다. 이날 회담에서 독도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고 정 보좌관은 전했다.

최훈 기자 <choihoon@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cyjbj@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