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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선 성분의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유씨의 증언.
『육본복도에서 장경순 준장을 만나 설명을 듣고 총장실로 들어가니 박소장이 있었어요.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측시 상황을 알아보니 외교대책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16일 하오 외무부에 연락해 윤석?방교국장과 다른 1명(문철정씨로 기억)을 불러 외교조치를 취하도록 했습니다. 대유엔 메시지, 주한외교사절에 대한 배경설명 등을 하도록 하여 우선 급한 불을 끄도록 했죠.
유엔군측의 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박소장은 「매그루더」사령관을 설득해 달라고 하더군요. 18일 혼자 「매그루더」사령관을 찾아 갔읍니다. 「매그루더」장군은 나를 만나자마자 <왜 쿠테타를 일으켰느냐><앞으로의 계획은 뭐냐>고 묻더군요. 나는 취지문과 혁명공약을 우선 전달하고 혁명의 동기·목적, 그리고 질서를 잡은 뒤 군에 복귀한다는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나는<이 방법외에는 수습할 길이 없다. 내버려두면 공산당에 넘어간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매그루더」장군은 시총 라는 태도였어요. 그는 박소장을 위시한 리더들의 성분에 큰 의심을 갖고 있었어요. 소득없는 면담 다음날인 19일 「매그루더」는 김정렬씨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이 층언처럼 미국은 혁명주체들을 불신했다. 당시 8군 영내에서 기거했던 ×관구 롱역장교단장 지성해 대위도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의 부탁으로 미군측의 혁명군에 대한 반응을알아 봤더니 박소장의 성향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주한 유엔군 사령부의 이 같은 태도와 마찬가지로 「케네디」행정부도 줄곧 불신의 눈을 던지고 있었다. 「매그루더」의 영향력이 한계를 드러낸 「18일 사태」 이후 미국무성이 타전한 것은 비상대책 3안. 그것은 사태를 평화롭게 진압해 정치와 군부간의 타협을 통해 조속한 시일내에 민정으로 복귀토록 하는 미국무성의 희망을 군사혁명지도자들에게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윤보선 대롱령의 지지성명이라는 충격과속에서 「케네디」대롱령 주재하에 열린 안보회의는 한국사태가 돌이키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지 않았나를 검토했다.
이 회의에서는 5·16사태의 중심인물인 박소장과 김종비씨의 백그라운드가 「앨런·덜레스」CIA국장에 의해 제기되어 심각하게 논란되었다. 서울 현지에서 보내온 CIA 메모에는 그당시 육군○○○부대로 알려진 정보연구소장 L소장이 현지 미국정보망에 박소장과 김종비 중령의 사상이 불온하다고 말한 것으로 되어있었다는 것. 얼마후 이 사실을 탐지한 혁명주체세력은 L소장을 체포해 버렸다. 때문에 위싱턴당국은 혁명을 주도한 장본인둘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짙게 했던 것 같다. 19일 김정렬싸를 만났을때도 「매그루더」는 이 같은 미국의 우려를 명백히 표시했다. 김정렬씨(전 국방장관)의 회고.
『육사생 데모와 장내각 사퇴로 혁명이 성공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확신되던 19일 돈암동 나의 집으로 예비역장성들이 찾아왔어요. 이들은<이제 혁명이 성공되어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는 나의 말에 미군이 계속 혁명군의 원대복귀를 지시하고 있어 사태가 아직도 유동적이라며 나더러 왜 나서지 않느냐고 채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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