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땐 유럽전선 주름잡아 한국전선 소·북한을 「안방」취급|「TP-스톨작전」주역…「토프트」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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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다음은 한국전때 북한주둔 중공군에 보급될 약품과 의료요원을 실은 노르웨이 화물선을 탈취한 「TP-스톨작전」을 총지휘했던 전설적인 미CIA 스파이 「한스·토프트」의 과거와 그가 한국전때 수행했던 다른 작전내용들을 워싱턴 포스트지(본사특약)에서 요약한 것이다. 【워싱턴-김건진특파원】
「토프트」는「TP-스톨작전」 이외에도 부산피난민수용소에서 북한인사들을 포섭, 북한에서 실종된 미군조종사 구출작전을 위한 게릴라를 투입하는가 하면 소련의 극동요새 블라디보스토크항에도 한국인 「요원」들을 계속 배치, 소련군의 동태를 항상 감시해왔다.
「토프트」가 아시아와 인연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덴마크선박회사「동아시아상사」는 당시 19세이던 선장의 아들 「토프트」를 북경으로 파견, 중국어를 배우고 해외에서의 경험을 쌓도록 했던 것이다.
이 선박회사는 「토프트」를 파견하면서 『당신이 해외에 나가면 앞으로 10년내엔 결혼할 생각도 하지말고 또 최소한 25년간은 해외에서 근무할 각오를 하라』고 당부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토프트」는 덴마크로 들아갔다. 그는 조국에서 지하운동에 가담했으나 나치점령지에선 히틀러군대를 패배시킬수가 없다는 현실을 발견했다.
그는 서류를 위조해서 대담하게도 독일군비행기를 타고 스페인으로 탈출, 곧바로 미국으로 향했다.
「토프트」는 OSS대장인 「월리엄·도노번」 소장과 함께 일하면서 독일군의 전력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양쪽으로 분산시키는 공작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OSS가 해산되자 「토프트」는 다른 정보기관에서의 근무제의를 거절하고 코펜하겐으로 돌아가 미국항공사 지점장으로 일했다.
그는 그후 50년6월하순 미캔자스주에서 2주일간의 예비군훈련을 받던중 아시아의 한국에서 새로운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이틀후 그는 워싱턴의 CIA본부로 출두지시를 받았다. 아시아에서의 다채로운 경력과 6개국어를 구사하는 그의 실력이 다시 필요하게 된것이다.
「트프트」는 동경근처에 본거지를 두고 1천명을 거느리면서 독자적인 기능을 발휘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동경에 와보니 CIA라는 것이 명색일뿐 6명의 서투른 요원들이 호텔방에서 일하고 있을뿐이었다. 「토프트」는 즉시 자신의 조직을 정비하고 OPC(정책협조기관)라는 가짜이름을 내걸고 동경남쪽75km지점 아쓰기공군기지 근처에 있는 땅 50에이커를 확보, 바로 건물 공사에 착수했다.
그는 미군의 각부대에서도 요원을 차출받아 제1차로 한국전에서 추락한 미공군 조종사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북한을 드나들며 미군조종사를 구출하려면 현지사정에 밝은 한국인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토프트」는 부산근처에있는 북한군포로와 피난민수용소를 방문, 그들을 일일이 심문하면서 특히 북한을 탈출해온 피난민들에게 주목했다. 심문결과 『북한을 공산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골라내 이들에겐 미CIA요원들과 함께 일하는 게릴라 임무를 부여했다. 이들의 훈련장소는 부산남쪽 영도로 결정됐다.
미해병대중령 「더치·크래머」가 지휘하는 미CIA부대는 영도에서 1천2백명의 한국인들에게 북한에서 작전할수있는 집중적인 훈련을 시켰다.
CIA는 이중에서 지도자급 역량이 있어보이는 한국인을 다시 선발, 일본의 찌가세끼훈련기지로 데려가서 보다 높은 차원의 비밀훈련을 시켰다.
한국전쟁당시 「토프트」에겐 한국과 일본에서 40대의 항공기를 사용할수 있는 권한이 부여돼 그의 작전반경은 한국뿐만아니라 동시베리아·몽고·북부중국·만주·쿠릴열도·유고등 아시아전체로 확대됐다. 특히 소련의 극동기지 블라디보스토크는 「토프트」의 중요작전 목표의 하나였다.
당시 소련군은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등을 하역노동자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CIA가 위장요원을 투입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CIA는 50년대말까지 최소한 6명이상의 요원을 항상 블라디보스트크에 배치, 소련해군의 움직임과 소련의 한국전개입가능성등을 탐지하고 있었다.
「트프트」의 CIA는 심리전에서도 소련을 제압하는데 큰신경을 썼다.
50년대말 소련은 2차대전때 시베리아에서 「실종」됐던 수백명의 일본군 포로를 석방하면서 그들의「인도주의」를 선전하고 일본내의 여론이 반미로 돌도록 공작하기 시작했다.
「토프트」가 일본안의 친소·반미감정고조를 한참 우려하고있던차에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고생했던 한 일본군대령의 일기가 CIA에 입수됐다.
「토프트」는 무릎을 딱 치면서 이 처절한 수용소의 내막을 영화로 만들어 일본전역에서 상영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CIA의 「감독」아래 일본영화기술자들은 소련강제수용소의 비참한 생활을 생생하게 영화에 담기 시작했다. 영화 촬영때 「토프트」는 토마토케첩을 가득실은 화차4량이 예정대로 준비됐는지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 그는 무엇보다도 소련군은 피를 좋아하는 잔인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실감있게 표현해야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완성된 이 영화는 일본전국 7백개극장에서 공전의 대히트를 쳤고, 「토프트」의 계산대로 일본내에서 엄청난 반소감정을 불러일으킨것은 물론, CIA는 10만4천달러의 부수입까지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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