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중국이 아낀 고려선비의 글을 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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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길에서 띄우는 편지
이제현 씀, 신무현 외 옮김
보리, 536쪽, 2만5000원

700년 전 고려 말, 만 권 서적을 품은 선비가 중국 원나라에 온다. 뜻은 크고 문장은 고매해도 쫓겨난 왕을 수행하는 신세다. 조선 사람치고 그만큼 중국을 섭렵한 이가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황하, 촉도, 함곡관 등 명소를 두루 다니지만 속이 좋을 리 없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고향을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는 절창을 남겼다.

"말과 수레 오고가는 함곡관 길에/몰아오는 먼지가 옷깃에 쌓이누나/이 세상 반쯤이나 두루 돌아다녔어도/마음은 들길 따라 고국으로 향하누나" 중국인이 아니면 쓸 수 없다는 장단구 형식으로 이런 글을 지으니 중국 문인들의 아낌을 받을 수밖에.

'역옹패설'로 알려진 이제현이 바로 그다. 기이한 이야기와 시화만 모아 남긴 인물이 아니다. 음풍농월로 붓방아만 찧는 문인도 넘어섰다. 원나라 지배를 받던 고려의 정부 대변인으로 외교문서도 썼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시로 남긴 참여파이기도 했다.

"요 못된 참새야 너 어디를 싸다니누/ 한 해 농사 어떤 건지 모르고/늙은 홀아비 홀로 가꾼 밭인데/조며 기장이며 다 까먹어 치우누나"라고 백성을 등치는 권력자들을 풍자한 것이 좋은 예다.

이 책은 이런 그의 글 전부를 오늘의 우리 글로 맛깔스레 풀어냈다. 북한 출판물 '조선고전문학선집'을 들여온 '겨레고전문학선집' 중 하나다. 이규보의 '동명왕의 노래' '조물주에게 묻노라'도 함께 나왔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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