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 "두려운 건 맘에 안 드는 작품 내놓는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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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나미(44)씨는 디자이너다. 종합디자인 회사 BAF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런데 디자이너나 기업대표란 틀을 부정하는 듯 보인다. 북 프로듀서란 이색 직함을 내세우고 어깨를 덮은 생머리를 고집한다. 그가 자신의 땀과 꿈을 공개한 '나의 디자인 이야기'(마음산책)를 냈다.

우선 당차다. 홍익대 미대 3학년이던 1981년 훌쩍 미국으로 떠나 다시 학부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한 것이 그렇다. 대학원 과정에서 만든 영한대역 전래동화 '나무꾼과 호랑이 형님'을 서울서 출간했는데 판로가 막히자 미국에 들고가 직접 서점을 찾아 다니며 초판을 팔아치운 것도 보통사람은 생각하기 힘들다. "자식같은 내 첫 책이 창고에서 썩는 걸 보고 살 길을 찾아주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감이 넘친다. "사회에 기여하는 잡지 하나 만들어 보자"는 선배의 권유로 93년 안정된 미국 생활을 훌훌 털고 돌아와 월간 '이브'의 편집장이자 아트 디렉터를 맡은 것도 그랬다. "이만한 잡지가 하나 쯤은 있어야지"하는 생각에 편집, 내용, 가격 등 여러 면에서 당시로선 파격적 실험을 즐겼다. 그러다 경영 사정이 악화돼 일년 만에 손을 떼고 혼자 북 디자인 사무실을 차렸다. 94년 1월이었다. "걱정은 안했어요. 출판사에서 제 발로 찾아와 일감을 맡기도록 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의 기억이다.

욕심도 많다. 책의 표지 뿐아니라 기획, 필자 선정, 내용까지 디자인할 때가 적지 않다. '내용과 형식이 조화된 책, 누구나 소유하고 싶은 책'이란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96년 15~25세를 겨냥해 정보와 재미, 감각을 아우른 '100과 사전'시리즈 8권을 한꺼번에 내 성공시킨 것이 좋은 예다. 한국 여인의 이별의 슬픔을 담은 한글 서체 '억장체'를 개발해 국제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프로다. 디자이너에게 두려운 것은 밤샘이 아니라 마감에 쫓겨 스스로 흡족하지 않은 작품을 내놓는 것이라 여긴다. 시간을 쪼개고 나눠 자기 페이스에 맞춰 작업해야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믿기에, 디자이너란 삶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여기 더해 "대상과 사랑에 빠져야 좋은 디자인이 나와요"라고 믿는 그의 진지함과 열성이 아름답다. 책을 사랑하든 않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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