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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상은 봉합하면 덧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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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열린우리당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대통령 측근 논란도, 호남 역차별 주장도, 민주당과의 합당 논란도, 고건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정계 개편 논의도 사라졌다. 진지한 논의 과정을 거친 것도 아니다. 지난 12일 전.현직 당의장과 원내대표, 상임중앙위원들의 만찬 회동에서 "당 화합과 단결에 최우선 가치를 둬야 한다"는 결의 하나로 없던 일처럼 됐다. 그러니 당내에서도, 국민도 여당의 분란이 수습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은 일제히 이를 '봉합'이라고 불렀다.

봉합(縫合)은 외상으로 갈라진 자리나 수술하기 위해 자른 자리를 꿰매어 붙이는 일이다. 여당의 갈등과 분란이 외상 수준이었다면 봉합하는 것으로 치료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대방을 '난닝구(실용파)' '빽바지(개혁파)'라 하고 "그쪽이 당을 나가면 화장실에서 웃을 의원이 많다"거나 "그런 주장을 한다면 당을 같이할 수 없다"는 막말을 서슴없이 해대는 상황을 단순 외상으로 보기는 힘들다. 깊은 내상을 외면한 채 그냥 덮고 말았으니 상처가 악화할 건 뻔한 이치다.

시간이 지나면 곪아 터질 줄 알면서 왜 봉합을 서둘렀을까. "여당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건 겉으로 드러난 명분에 불과하다. 병의 원인을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보다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그러다가 당이 깨질까봐 겁나는 것이다. 당정 분리로 과거의 프리미엄을 누리지 못한다고 투덜대면서도 여당의 달콤한 울타리를 벗어나기가 두려운 것이다. 소위 개혁파는 내놓고 진보정당을 할 용기가 없고, 소위 실용파는 정치권을 주도할 의지나 자신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러니 임시변통으로 봉합하는 것으로 끝낸 것이다.

이 와중에 불거진 호남 의원 탈당설이나 호남 소외론, 민주당과의 합당론은 여당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청와대에 호남 출신 비서관이 두 명뿐이라는 게 호남 소외론의 근거인데, 당은 호남 출신 의원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합당론도 그렇다. 4.30 재.보선에서 완패했다고 해서, 또 내년 지방선거에서 호남의 지지 없이는 어렵다는 계산에서 그런 주장을 한다면 지역구도로 회귀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주당과 결별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정치개혁과 지역구도 타파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민주당과는 노선이나 성향이 비슷하다"고 추파를 보낸다면 스스로 존립 근거를 부정하는 꼴이다. 언젠가 명분이 생길 때까지, 또 그것을 국민이 용인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여권 위기의 본질은 아마추어적 정부 운영과 경제정책 실패에 있다. 이를 외면하고서는 백약이 무효다. "국민은 현 정권의 선의는 인정하면서도 능력이 부족하다고 본다"는 김한길 의원의 지적은 핵심을 짚었다.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대나이지리아 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조건적인 우정과 단결 때문이 아니었다. 페널티킥을 실축하거나 결정적 찬스를 놓친 선수는 진심으로 동료에게 미안해 했고, 실수로 골을 내준 골키퍼는 전반전이 끝난 뒤 라커룸에서 눈이 붓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런 진지한 반성의 과정은 생략한 채 국민의 지지나 당내 단결을 기대하는 건 염치없다. 고통스럽더라도 잘못에 대해 시인하고 드러내 놓고 토론해 국정 방향을 재점검해야 한다. 능력있는 인사를 기용해 무능의 딱지를 떼내야 한다. 지금같이 하고서도 "다음 대선에서는 이기게 돼 있다"고 한다면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