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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 김동삼 선생의 헌신 잊지 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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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지금 6월은 보훈의 달. 보훈처가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분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기림은 독립운동을 기리는 것뿐 아니라 그분을 통해 오늘에 교훈을 받고자함도 있을 것이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이 바로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 지도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헌신과 통합일 것인데, 일송 선생이야말로 일생을 통해 이를 실천하심에 우리 독립운동 사상 가장 드높은 지위에 있는 분이라 하겠다.

일송 선생의 독립운동은 투철한 '무장 적극 투쟁'노선이었지만 그 실천은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그 독립운동의 뿌리가 되는 만주 우리 동포들의 통합이었다.

선생은 의병과 유림의 고장 안동에서 혁신유림의 선봉에 서서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의 창설에 참여했다가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가 고향 선배이며 인척이기도 한 석주 이상룡.백하 김대락 선생, 그리고 이회영.이시영 선생과 합류해 경학사.부민단.백서농장.서로군정서.신흥무관학교.대한통의부 등을 조직해 갈래가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동포들의 통합에 몸 바쳤다. 선생은 이상룡 선생 등 선배 등을 받들고 참모장 등 실무를 도맡아 독립군을 양성해 전투에 참여시키고 동포들의 교육과 생업을 뒷받침했다.

독립운동 사상 단 한 차례인 1923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의 전체가 상하이(上海)에 모인 국민대표회의에서 선생은 투표로 의장에 선출됐다. 우여곡절 끝에 선생이 의장에 선출되자 부의장에 선출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선창으로 '김동삼 만세'가 회의장을 진동했다고 한다.

선생이 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자 만해 한용운 선생이 유해를 자신의 심우장으로 모시고 장례를 치렀는데 이를 김관호 선생이 기록해 후일 만주에서 귀국한 후손에게 주었다. 기록하기를 "만해는 통곡하며 '유사지추에 이분이 아니고는 대사를 이룰 수 없다'고 하여 '독립운동가 모모씨 등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시느냐'고 반문하자 '그런 분 백, 천이라도 이분을 당할 수 없고 도리어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해방 뒤의 그 복잡한 분열상을 예견하고 통합의 인물을 아쉬워함이 아닌가 한다.

선생의 생애는 헌신으로 일관했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안동 의성 김씨 일문과 함께 재산.명문 등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가 밭 갈고 싸우고 가르쳤다. 당시 안동지방에서 선생과 함께 만주로 간 분이 대충 500여 명이 될 것이라고 조동걸 교수는 본다. 이들은 아들.딸.형제는 물론 처가.외가 등 집안 친인척이었으니 오늘날 공직자의 자녀가 국적을 버리는 세태와는 사뭇 다르다. 선생과 함께 고생하다가 사돈이 된 이원일 선생의 회고록에는 "선생은 담요 한 장을 메고 싸구려 좁쌀 떡으로 끼니를 때우고 겨울에도 싸이혜라는 여름신발을 신고 백여 리씩 걸으며 동포들을 찾아다녔다"고 썼다. 선생은 8년 동안 형무소에 있으면서도 옥중 투쟁을 쉬지 않았다.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같은 형무소에 있던 김철수씨의 회고로는 "형무소 안의 죄수들이 단식 투쟁을 하며 '용수를 쓴 저분(일송)에게 물어보라'고 당황한 일제 간수에게 말하면 선생은 형무소장이 무릎을 꿇고 사과하도록 했다"고 한다.

선생은 "나라를 잃은 몸이 무덤은 남겨 무엇하냐. 나 죽거든 불살라 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에 떠돌며 조국이 광복하는 것을 지켜보리라"라고 유언해 화장하여 한강에 뿌렸다. 선생은 무장 독립운동가답게 기록 한 줄, 사진 한 장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돈이 없어 면회를 못 가는 가족이 선생이 빠진 채 찍은 사진을 형무소로 보낸 것이 한 장 있고, 고향의 남은 땅을 처분해 독립운동에 보태라는 편지 한 장이 있을 뿐이다.

올해 선생이 보수적 전통 유림으로부터 혁신유림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한 협동학교가 있었고, 선생이 100년 전 처자식.형제.문중을 모시고 이끌고 독립운동을 위해 떠났던, 그러나 꿈에도 그리워 했을 500년 이어온 고향 마을인 안동 내앞(川前)에 민족운동기념관이 착공된다.

그러나 이보다 선생을 진실로 기리는 것은 나라를 위한 헌신과 통합을 후손들이 배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도현 전 문화체육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