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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묻은 사람이 남의 부정 탓할 수 있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지난여름 경부선 열차에서 옆 손님의 종교신문을 빌어 읽게 되었다.
나는 신문을 읽다가 광고 난에 눈이 머물렀다. 거기에는 『급매』라는 제목이 있고 그 내용은 어느 종교건물을 평수 구조 신자수 조직기구원매자 연락번호 등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또 얼마 전에는 어느 분이 종교의 모 건물을 사라고 하는데 사도 좋겠느냐는 상담을 받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안 사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말을 흘려버렸던 일이 있다. 신도들의 어려운 성금에 의하여 건설원 건물들이 스스럼없이 매매되는 모습은 무엇인가 잘못되었어도 몹시 잘못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이것을 팔아서 종교적인 다른 사업을 하기 위한 것이겠지 하고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으나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종교는 사회의 목탁이다. 또 양심의 샘터라고 할 수도 있으며 부정에 대한 방파제이기도 하다. 이런 종교의 역할이 잘 수행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하고 반성해 보곤 한다. 사회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울려 있다.
모두 그 요소들이 맡은 바 역할을 잘하는 사회가 이상사회라고 할 때 현대사회는 자기분야의 역할들이 잘 되지 않아서 상당히 뒤틀리고 있다. 그래서 신문의 사회면은 항상 마음 아픈 일 뿐이다. 그 각 분야의 역할 중에도 가장 중심적인 역할이며 깊이 있는 역할은 역시 종교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종교는 양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다. 마치 유수한 기업체의 수출이 신장되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종교적인 건물들은 날로 대형화하고 많아지며 그 행사도 대형화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사회의 역기능적인 현상은 점차 더해가고 있어서 굵직하고 부끄러운 사건은 우리들의 가슴을 친다.
이러한 혼란한 사회현상을 누가 가장 많이 책임져야 할 것인가? 그것은 정치인도 경제인도 교육인도 모두 분담해야 할 책임이지만 가장 무겁게 책임을 느껴야 할 장본인은 종교인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종교인이라고 명함을 내놓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컨대 종교인에게는 세상의 잘못을 대신 속죄하고 이를 내 책임으로 돌리는 자비와 은혜의 정신이 극히 필요한 원리다. 부모님의 자비심은 그 한계가 자신의 자녀에 머문다. 그러나 성직자들과 철든 종교인의 자비는 그 한계가 없이 넓은 것이다.
무연대비가 진대비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렇다. 자기 자신의 자식을 자신이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비롯하여 동물들에게 모두 있는 본능적인 것이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사랑보다는 역시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자비심 그것이야말로 참답게 가치 있는 자비심이 아닐 수 없다.
성직자의 임무는 그 자비의 영역을 넓혀 가는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계를 넘어선 자비심을 세상의 그릇됨과 오탁함을 모두 책임지려는 참회의 정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지금 세상은 책임지려는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적고 그 책임을 전가하려는 손님들만이 살고 있는 그런 여인숙처럼 느껴진다.
내 종교 네 종교, 나의파 너희파 등으로 갈라진 종교들은 그 사이의 장벽이 두꺼워가고만 있는 느낌이 든다. 남의 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신뢰해주려는 폭 넓은 종교인이 많아야만 되겠다. 남의 종교를 헐뜯고 백안시하려드는 종교인의 닫혀진 마음 안에서 자비심이나 사람이 우러나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비심은 국경을 넘어서고 인종을 넘어서고 사람과 증오를 넘어서고 정의와 불의를 넘어서고 너와 나를, 동양종교와 서양종교 등의 한계를 녹여내는 한량없이 따뜻한 그 무엇이다. 종교는 권위주의와 형식성을 벗어나서 자비심으로 돌아와야 한다.
종교인은 수도인이다. 수도란 자신을 밝히는 것이다. 더럽혀진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이란 참으로 성스런 일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구제하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나 구원에 대한 신념도 없는 사람이 어찌 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위선이며 종교를 빙자한 장사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종교인은 세상의 오탁 함을 탓하거나 이웃의 부정함을 욕하기 전에 나의 때묻음을, 나의 지조 없음을 염려해야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인이 지나치게 세상에서 떠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자신을 승화시키는 그런 수도를 하는 일이 세상을 조촐하게 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성직자들이 수도는 게을리 하면서 제중사업을 한다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마치 더러운 걸레로 청소를 하는 것과 흡사한 일이다.
그러나 수도 역시 자비로운 교화사업을 더욱 잘하기 위한 목적을 저버린다면 독선기신에 빠지게 되므로 그도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린이는 어린이 다와야 하듯이 종교인은 역시 종교인 다와야 한다. 종교인의 길이란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라고 한다. 과연 참다운 성직자는 누구인가 하고 반생 해본다.
◇노력 ▲1927년 전남영광출생▲원광대학교 교학과 졸업 ▲원불교 부산동래교당교무 ▲원불돈 광주교당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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