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시인의 밭에 가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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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화순(1957~ ), '시인의 밭에 가서'

비 오다 활짝 갠 날, 김포 대곶리 시인의 텃밭에 가서 나는 보았네. 엉덩이 까고 펑퍼짐하게 나앉은 비닐 모판 위 배추들. 하나같이 큰 손바닥만한 잎들에 구멍 숭숭 뚫려 있었네. 제 둥근 몸 안에 벌레를 키우고 꼿꼿이 서서 가을을 당당히 걸어가는 속이 꽉 들어찬 아낙들

그렇지, 사는 일은 빈틈없는 생활에 구멍 숭숭 내는 일이 아닌가 몰라. 벌레가 먹을 수 있어야 무공해 풋것이듯이 생활도 벌레를 허용할 수 있어야 자연산 인간일 수 있다는 생각. 그렇지, 사는 일이란 시인의 밭에 자라고 있는 배추처럼 자신의 몸이 기꺼이 누군가의 밥이 되는 일 아닌가 하는 그 푸른 기특한 생각, 들판 가득 향기처럼 번지고 있었네.


농약을 먹고 자란 배추는 자신의 몸 안으로 벌레를 들일 수 없다. 제 몸 안에 벌레를 키우면서도 당당히 가을을 걸어가는 몸 푸른 배추들을 보라. 벌레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밥으로 내놓는 저 눈부신 소신공양. 무공해 생명들의 이타적 행위가 이기로 가득 찬 우리들 빈틈없는 생활을 되돌아보게 한다. 배추가 벌레에 그러하였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기꺼이 푸른 밥이 되는 생활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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