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꼬마가 어른이 되는 12년의 마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그 어떤 극적인 드라마도 없다. 대신 반짝이는 일상이, 누구나 경험했을 삶의 순간들이, 누구나 공감할 보편적 감정들이 가득하다. ‘보이후드’(원제 Boyhood, 10월 23일 개봉,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는 그렇게 보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고 어루만지는 영화다. 여섯 살 소년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이 열여덟 살까지 자라며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 놀라운 것은, 12년이란 세월을 담고 있는 이 영화가 실제로 12년 동안 조금씩 찍어 완성한 작품이란 점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물론이고 배우들도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다. 특히 주인공 메이슨 역을 맡은 엘라 콜트레인, 감독의 친딸이자 메이슨의 누나 역을 맡은 로렐라이 링클레이터가 작품과 함께 자라고 변화한 모습을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건 경이롭기까지 하다.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원한 페르소나인 에단 호크도 메이슨의 아버지 역으로 ‘보이후드’의 12년 세월을 함께 했다. 지난 7월 미국 개봉에 맞춰 베벌리힐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링클레이터 감독과 에단 호크를 만났다.

-쉽지 않은 프로젝트인데 진행하는 내내 걱정도 많았겠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하 리처드) “왜 없었겠나. 촬영 초창기, 특히 1년차에서 2년차로 넘어갈 땐 고민이 정말 많았다. 끝이 아득하게만 보였고 모든 게 너무나도 모호했다. 그러다 절반 정도 찍고 나서부터 서로 ‘이제 반은 넘어 왔네’라고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모든 게 편해졌다. 가면 갈수록 탄력이 붙는 느낌이었다.”

에단 호크(이하 에단) “운이 좋았다. 무엇보다 제작투자사인 IFC필름의 담당자가 해고되거나 다른 회사로 옮기기라도 했다면 프로젝트의 앞날이 불투명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가 12년간 자리를 지키며 매년 조금씩 제작비를 빼돌려준 덕에 이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웃음).”

-촬영이 없는 공백 기간 동안은 서로 어떻게 지냈나.

리처드 “이 작품은 모두에게 일종의 부업이자 일생일대의 장기 프로젝트였다. 12년간 각자 다른 작품 활동으로 바쁘게 지냈지만 늘 책임감을 갖고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특히 엘라 콜트레인과 자주 만나 그 다음 해 분량을 어떻게 진행할까 의견을 교환했다. 에단과는 전화로 자주 수다를 떨었다. 촬영이 없을 때도 모두가 안테나를 세운 채 영화에 응용하면 좋을 법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일 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촬영 일정이 정해지면 더 집중적으로 함께 다음 스토리를 만들어갔다.”

-비극적 상황을 설정해 좀 더 극적으로 연출하고픈 욕심도 있었을 텐데.

리처드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전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극적 이야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세상엔 아무도 보통의 일상을 담은 영화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 다들 뭔가 엄청난 사건이 있는 이야기를 원한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산다. 인생에서 한두 번씩 작은 굴곡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이를 무사히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나. 돌아보면 우리의 기억 속엔 자동차 사고나 크게 다쳤던 일 말고 소소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훨씬 많다.”

에단 “대개의 영화 속엔 거짓 내러티브가 판을 친다. 일생일대의 큰 사건들이 영화 속에선 단 몇 개월 내에 벌어졌다 마무리되곤 한다. 실제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가장 행복했던 점은 그 어떤 거짓도 없는, 진실된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일상에도 깊은 감명을 주는 몇몇 순간들이 있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오랜 시간과 수천, 수만 가지 평범한 일상들이 없다면 그 한 번의 순간은 결코 특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시간’을 오롯이 경험하게 해준다. 배우와 제작진도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를 깊이 알게 되면서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그게 스크린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관객 역시 캐릭터의 경험과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음악 선곡에도 공을 많이 들인 듯하다.

리처드 “음악은 한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다. 그런 만큼, 영화에 사용된 음악들이 각 시대의 분위기와 당시의 문화를 잘 그려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속 음악들이 각 캐릭터가 특정 연령대에 지녔을 법한 취향을 드러내주기도 바랐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까지 음악 선곡 작업에 많은 공을 들였다. 저예산 영화라 음악 사용료로 쓸 돈이 많진 않았지만, 여러 뮤지션들이 영화의 취지에 공감해 선뜻 음원을 쓸 수 있게 해줘서 좋은 곡을 여럿 사용할 수 있었다.”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책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아이들의 모습처럼, 특정 시대의 트렌드를 선별해 담은 장면들도 눈에 띈다.

리처드 “이 영화를 찍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현재 시제’에서 ‘시대극’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등장 인물들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변해가고 문화가 바뀌어 간다는 점에도 늘 관심을 두어야 했다. 매해 촬영 분량을 구상할 때마다 당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 중 어떤 것을 영화 속에 담아내야 할지 고민하고 선택하는 게 큰 숙제였다. 이야기 흐름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가 아니라 해도, 해리포터 신드롬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참 뒤에 당시를 추억했을 때에도 잊지 않고 떠올릴 수 있을 법한 현상들을 잘 골라 넣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하는 장면도 아주 흥미롭다.

에단 “그 장면에서 묻어나는 아빠와 딸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는 상당 부분 실제 감정이었다. (극 중에서 딸 역할을 한) 로렐라이를 워낙 어려서부터 봐 와서 ‘이 아이가 이런 연기를 할 만큼 컸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다. 나도 열여섯 살짜리 딸의 아버지이자 꽤나 보헤미안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아이들 성교육에 있어선 영 젬병이다. 언젠가는 딸 책상에 성교육 책을 슬그머니 두고 나와 버린 적도 있다.”

-촬영 중 생긴 재미난 에피소드라면.

에단 “운이 좋았던 순간이 많다. 로렐라이가 볼링장에서 스트라이크를 치는 장면이 있는데, 촬영 당시 내가 다른 스케줄 때문에 빨리 현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로렐라이가 고맙게도 단 두 번 만에 스트라이크를 쳤다. 아이들과 함께 야구장에 경기를 보러 간 장면에서는 아무런 기대 없이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뭔가 재미난 상황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제이슨 레인 선수가 기가 막힌 홈런을 쳐줬다.”

-배우들의 즉흥 연기에 의존한 부분은 얼마나 되나.

리처드 “거의 없다. 대사보다는 각 장면의 톤을 더 중시한 것만은 확실하지만, 두어 장면을 제외하곤 모든 장면을 대본대로 카메라 리허설까지 진행한 후 촬영했다. 오래 전부터 계획해 미리 써 놓은 대사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대사는 현장에서 촬영 직전에 쓰거나 수정하기도 했다. 엔딩 장면도 전체적인 그림은 이미 10년 전에 구상을 끝냈지만 대사는 촬영 하루 전에 썼다. 준비가 덜 됐거나 뭘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때가 되면 좋은 대사들이 나에게 와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편집은 어떻게 했나.

리처드 “매년 그 해 촬영한 분량을 먼저 편집하고 이전까지 완성해놓은 편집본에 붙인 다음, 처음부터 전체를 또 한 번 편집했다. 보통 정해진 일정에 맞춰 영화를 찍다 보면 정신없이 촬영하고 공장에서 물건 찍듯 편집을 해치워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1년에 평균 사흘 촬영을 하고 나면, 다음 촬영까지 다시 1년 동안 충분히 생각하고 다시 편집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됐다. 정해진 일정이 아무것도 없으니 개봉일에 맞춰 영화를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도, 프로듀서의 재촉도 전혀 없었다. 정말 호강에 겨운 편집 작업이었다. 그렇게 작업하다 보니 난생 처음 영화 자체가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나 스스로 자라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12년이란 세월 동안 자신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는 느낌은 어떤가.

에단 “초반만 해도 ‘흠, 아직 쓸 만하군’ 하고 생각했다가 가면 갈수록 내리막을 걷는 듯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웃음). 하지만 재미있었다. 왜 다들 우리 인생 최고의 순간이 가장 젊었을 때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두렵고 외면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니겠나. 영화 속 나이 든 내 모습이 자랑스럽다.”

-혹시 4~5시간짜리 감독판도 따로 있나.

리처드 “없다. 촬영하고 안 쓴 장면 자체가 거의 없다. 생각하고 준비할 시간이 많아서 늘 필요한 만큼만 효과적으로 찍었다. 물론 DVD에 넣으면 재미있을 만한 장면이 몇 개 있긴 하다. 촬영 첫 해에 로렐라이가 브리트니 스피어스 노래를 부르는 부분에서, 혹시나 후에 음원 사용 허가를 받지 못할까봐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3, 하워드 혹스 감독)에서 메릴린 먼로가 노래한 ‘다이아몬드는 여자들에게 최고의 친구(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를 부르게 해서 찍어놓은 게 있다. 언젠가 메이킹 필름을 내놓는다면 그 제목은 ‘노예 12년’으로 해야 할 거라고 우리끼리 농담도 하곤 한다.”

-다시 한 번 12년 동안 ‘맨후드’를 찍어볼 의향은 없는지.

리처드 “아직 그런 생각을 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워낙 새로운 시도였고, 아직 촬영을 끝낸 지 채 1년도 안된 상태라 영화가 마무리됐다는 게 실감 나지도 않는다. 지금은 딱히 구상 중인 스토리가 없긴 하지만, 누가 아나. 이젠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를 찍을 가능성도 있다. 20여 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비포 선라이즈’(1995)를 찍고 나서 에단과 마주 앉아 ‘우리가 이 캐릭터들로 다시 영화를 찍을 일이 있을까’ 생각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니 모를 일이다.”

베벌리힐스=LA중앙일보 이경민 기자

전례 없는 장기 프로젝트가 완성되기까지

영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마법을 부린다. 두 시간 남짓한 영화 안에 1년의 시간이 담길 수도, 100년의 세월이 흐를 수도 있다. 여기에는 편집과 캐스팅은 물론이고 분장이나 각종 특수효과까지 온갖 영화적 장치가 동원된다. ‘보이후드’는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영화적 시간의 마법을 부린다. 그 비법은 실제 시간이다. 같은 배우의 모습을 실제 12년에 걸쳐 촬영해 극 중 12년의 시간을 완성해냈다.

그 시작은 2002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앳된 소년이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매년 촬영해보면 어떨까.” 대개의 영화가 수 개월 만에 촬영되는 현실에서 벗어나 보자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긴 시간 동안 함께 해줄 스태프와 제작자는 물론이고 이 실험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할 배우를 섭외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자칫 프로젝트가 무산될 위기를 겪은 끝에 어렵사리 지금의 제작진을 꾸렸다.

‘보이후드’는 전례 없는 프로젝트였던 만큼 제작 과정에서도 새로운 선례를 남겼다. 미국에서 영화 관련 계약은 대개 최장 7년으로 제한되어 왔는데, ‘보이후드’는 12년 계약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여기서 잠깐, ‘12년’과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링클레이터 감독은 당초 이 영화의 제목을 ‘12년’으로 정했다. 제목을 바꾸게 된 것은 ‘노예 12년’(2월 27일 개봉, 스티브 맥퀸 감독)과 혼선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극 중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장치는 배우들의 모습 그 자체다. 이렇다 할 분장을 하거나 아역 배우와 성인 역 배우를 교체하는 대신, 배우의 얼굴이 달라지고 키가 자란 모습 그 자체를 보여준다. 특히 여섯 살에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 되어 열여덟 살까지, 12년의 세월 동안 주인공 메이슨을 연기한 엘라 콜트레인의 모습은 마치 그의 성장기 앨범을 차례로 펼쳐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매년 서너 번씩 배우들과 만나 촬영을 진행했다. 한 해 촬영한 분량은 영화 속에서 대략 15분 남짓으로 등장한다. 꼬마 메이슨이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 사춘기의 메이슨이 반항적인 시절을 보내는 모습, 10대 후반의 메이슨이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 등등이 차례로 담겼다. 그 과정에서 메이슨은 엄마 올리비아(패트리샤 아퀘트)와 갈등하며 독립을 꿈꾼다. ‘보이후드’는 그렇게 12년 동안 총 40여 일을 촬영한 끝에 완성됐다.

돌이켜 보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실험의 연속이었다. 그의 첫 장편 ‘책으로 쟁기질을 배울 순 없다’(1988)는 1년 동안 촬영하고 1년 동안 편집했다. 미국 독립영화계에 그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슬랙커’(1991)는 단 163컷 안에 100여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무정부주의에 열광했던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렸다. 당시 영화들이 보통 1000컷쯤으로 구성된 점을 감안하면, 단연 파격적인 형식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비포’ 시리즈 역시 결과적으로 영화적 시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됐다.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 커플의 만남과 재회, 부부 생활은 각각 9년의 시차를 두고 ‘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까지 총 18년에 걸친 3부작으로 완성됐다. 특히 ‘비포 선셋’은 제시와 셀린느가 서점에서부터 셀린느의 아파트까지 걸어가는 80분의 여정이 영화의 상영 시간인 80분과 일치하는 ‘리얼 타임’ 영화라는 점에서도 시선을 끌었다.

이런 링클레이터의 이력에서도 ‘보이후드’는 경이로운 영화다. 올해 2월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되어 감독상에 해당하는 은곰상을 받았다. 미국 영화 평론사이트 메타크리틱에선 이례적으로 100점 만점에 100점을 받았다. 이 놀라운 프로젝트를, 한 소년이 어른이 되어 가는 빛나는 순간을 이제 당신이 경험할 차례다.

글=매거진M 지용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