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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등한 우리 문화 흡수 위해 일본은 조선통신사 대규모 초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진희씨는『조선시대 통신사는 우리 나라와 일본덕천막부 사이의 2백40여년간의 우호친선관계를 상징한다』고 말하고『이는 특히 일본측에 큰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일본학자들이 무시하는 17세기초부터 명치유신까지의 우리 나라와의 우호관계가 일본 사에서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들의 조상들이 우리 문화를 얼마나 동경하고 이를 배우기 위해 애썼는지를 밝혀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신왜란직후 국교회복에 노력한 일본은 우리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중국의 정세도 파악하면서 우리 문화를 흡수하는데 노력하였다.
일본학자들은 소위 덕천시대를「쇄국의 시대」라고 하나, 덕천막부가 1633∼39년 사이에 3차례나 내린「쇄국령」속에서도 1636년 우리 통신사일행 3백명은 대환영을 받으면서 강호까지 왕래하였고 일본 또한 부산에 초량왜관이 설치되어 일본무역선이 출입하며 6백여 명이 상주했다. 외교실무는 동래부사와 일본 대마도 영주가 담당, 수시로 연락하고 있었다.
12회에 걸친 통신사가 왕래할 때마다 4백80명 내지 5백명씩의 일행을 맞는 일본측의 영접규모는 매우 성대했다. 영빈관을 24채나 신축하였고 우리축 배 6척을 인선하기 위해 5백 척의 배와 3천여 명의 수부 및 거의 같은 수의 접대인원이 동원되었으며 호화판 요리로 접대하였다. 이는 그들이 통신사 일행을 영접하는데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예-.
또 통신사 일행에는 일본측의 요청에 의해 우리 나라 제1급의 학자·화가·의자들이 동행했으며 귀국 후 얼마 안되어 일본에서는 교류한 기록들을 출판하되 그 종류가 매회 20여종에 달했는데 특히 우리 의학서의 출판이 성행했다. 이 시기의 우리 나라는 일본에서 배운 것보다 그들에게 준 것이 훨씬 많았다.
이씨는 일본에서 관서·구주지방을 자주 여행하며 통신사의 사적이나 기록을 찾아보며 연구할 때 이는 자신의 국사를 배우며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되찾는 긴장된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통신사에 관한 사적 여행을 통해 일본의 근대사학이 우리의 역사와 한일관계사를 얼마나 혹심하게 왜곡했는지 재확인해 주었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통신사를「조공사」운운하는 설명을 각지에서 볼 수 있다고 지적하고, 특히『항상 침략만 당하는 보잘 것 없는 뒤떨어진 나라』로 왜곡되어있는 교과서로 배운 일본인 속에는 우리 민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농후하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통신사 사적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감명을 받은 것은 우리 사신들이 자신의 나라와 문화에 대해 높은 긍지를 갖고 있었으며 일본인들은 한없이 우리를 존경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들은 우리 통신사일행을 정성껏 그렸으며, 또 우리 통신사들이 남긴 글과 그림도 각처에 남아 있다고-.
이씨는 끝으로 이 같은 자료들을 모아 전시회가 이뤄지기를 바랐다. 그것은 일본인에겐 잘못된 한국관을 고치는 큰 계기가 될 것이며, 일본에 왜곡된 환상을 가진 재일 동포와 우리 청소년에겐 눈을 뜨게 하는 산 자료로서 자신의 역사와 문화에 긍지를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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