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직장인들에「아호」짓기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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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 아호(아호)지어 부르기가 유행이다. 뜬구름처럼 허허롭고 행동이 느리다해서 백운, 고향 지명(경북 경산)의 음을 따서 경산, 국화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다해서 국농, 새처럼 체구가 작고 수다스럽다해서 청조라 부른다. 남자는 산·암·해 등 남성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한자를, 여자는 새·꽃 이름 등 여성적인 글자를 즐겨 쓴다. 특히 매·난·국·죽 등 사군자는 여성 아호에 빠지지 않는 약방의 감초.
대학생들의 아호는 학생들 사이에 흔히 부르는 별명이나 은어와는 품격(?)이 다르다.
그것은 정신적 여유와 이지적인 젊음을 돋보이는 것이며 젊은이다운 기지와 유머가 번득여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유형>
자신의 성질이 급해서「백 번 참아라」하는 뜻으로 서클선배로부터「백인」이라는 호를 받았다는 정지영군(21·K대농화학과2년).『일상생활에서 느끼지 못하는 탈속적 분위기와 풍류를 느껴』이름대신 호를 즐겨 부른다고 했다.
임종구군(22·중앙대 국문과4년)도 자신의 성격 때문에 호를 얻었다.
다른 사람의 빈틈을 잘 찌르기 때문에「허타」라는 호를 받은 임군은 노작 홍사용과 회월 박영희의 이름과 호에서 각각 1자씩을 따 사월이라는 호를 지어 스스로의 문학적 이상향을 나타내려 했으나 허타라는 호가 더 재미있고 친근감이 간다고 했다.
또 군복무중인 이경봉군 (22) 은 별명에서 호를 얻은 케이스.
이군은 자신의 이름이 음운학 상으로「꺼벙이」와 같아 꺼벙이라는 별명으로 통해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술좌석에서「음 탈락 현상이 일어나「거봉」이라는 호를 얻게 됐다고 국어학적(?)인 주석을 붙인다 (경봉 꺼벙 거봉).
호를 여러 개씩 갖고있는 사람도 있다.
변인수씨(25·회사원)는 호를 사철에 하나씩 모두4개의 호를 갖고 있다.
등반을 즐기는 변씨는 특히 흰 눈 덮인 겨울 산을 좋아해서 스스로 설봉이라 부르고 봄(춘봉)여름(하봉)가을(추봉)등 계절에 걸 맞는 호를 따로 갖고 있다.

<작법>
까다로운 절차나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자유롭게 지어 부르는 것이 젊은 층 아호의 특징.
무엇보다 먼저 알기쉬운 한자를 골라쓰되 개인의 성격과 이미지를 돋보이도록 한다.
바위·산·바다는 남성아호에, 새·꽃 이름은 여성아호에 쓰이며 진·선·미 등은 너무 완전하기 때문에 잘 쓰지 않는다.
그러나 우·촌 등 글자는 겸손함을 나타내고「안빈낙도」하는 선비정신을 돋보인다 해서 즐겨 쓴다.
오래 전부터 아호를 연구,「호보」까지 작성중인 박희영씨(59·동국대 도서관열람과장)는 젊은 층의 「아호 짓기 바람」에 대해『호를 지어 부르는 것이 자기만의 정신영역을 갖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다. 각박한 물질문명사회에서 우리 고유의 옛스런 멋과 풍류를 찾자는 이유 있는 반항(? 』이라고 풀이하고『이 같은 움직임이 단순한 복고풍의 취미에 그치지 않고 호의 참다운 의미를 발견, 계승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길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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