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혼으로 이룬 '박찬호 신화'] 100승하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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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5일(한국시간) 미국 중부 캔자스시티의 카우프먼 스타디움.

11-4로 크게 앞선 5회 말 박찬호는 마운드에 오르면서 심호흡을 하고 모자를 고쳐 썼다. 아웃카운트 세 개면 승리투수 조건을 얻게 되는 순간이다. 7점 차로 앞서고 있으니 승리는 이미 텍사스 레인저스의 것이었고 100승도 떼논 당상이었다. 두 명의 타자는 순탄했다. 1루 땅볼과 유격수 땅볼. 이제 한 타자만 남았다. 그러나 시련이 찾아왔다. 매트 스테어스에게 볼넷을 내준 박찬호는 에밀 브라운에게 중전안타, 테렌스 롱에게 1루쪽 내야안타를 내주고 2사 만루의 위기에 몰렸다. 홈팀의 찬스에 환호하는 관중들. 레인저스 불펜에 구원투수 론 메이헤이가 대기하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마크 티헌 타석을 앞두고 오럴 허샤이저 투수코치가 나와 박찬호의 긴장을 풀어주며 다독였다.

풀카운트까지 간 접전 끝에 티헌이 중전안타를 때렸다. 추가 2실점. 한 타자를 남기고 자칫 마운드에서 내려가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박찬호는 마지막 순간 알베르토 카스티요를 2루수 플라이로 잡아내며 이닝을 끝냈다. 스코어는 11-6. 박찬호의 100승을 확정지어주기에 충분한 점수였다. 레인저스는 결국 14-9로 이겼다.

박찬호는 마운드를 내려가며 만족할 수 없는 투구 내용 탓인 듯 고개를 숙이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더그아웃에 들어서는 순간 동료 크리스 영이 가장 먼저 다가와 100승을 축하하는 하이 파이브를 건넸고 다른 동료들도 축하 인사를 건넸다.

박찬호의 고교 때 별명은 '박상'이었다. 유난히 상복이 많아 붙은 별명이다. 중요한 순간에 행운이 따랐다. 이날도 그랬다. 박찬호는 11안타.6실점을 기록했다. 100승을 거두는 동안 안타를 11개나 맞은 적은 없었다. 자신의 최다 피안타 승리 경기를 바로 100승째에 기록한 것이다.

◆ '100승의 현장' 캔자스시티에서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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