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기 KT배 왕위전' 폐부를 찌른 171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39기 KT배 왕위전
[제11보 (164~179)]
黑. 이영구 4단 白. 이세돌 9단

두터움은 편한 것이다. 여건이 좋으니까 좋은 수가 척척 보인다. 엷음은 그 반대다. 불편하고 고단하며 유리해도 끝까지 좌불안석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도 수많은 고수들은 엷음의 고통을 자청한다. 왜일까.

엷음의 고통도 집없는 설움만은 못하기 때문이다. 바둑은 집으로 승부한다. 그런데 판은 다 끝나가는데 집이 모자라면 소위 '집 부족증'의 고통을 맞보게 된다. 이게 엷음의 고통보다 더 괴롭다.

바로 그 집 부족증을 염려하여 초반에 빠르게 집을 짓다 보면 이번엔 엷음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바둑이란 그런 것이다.

166, 170. 이세돌 9단의 이 두 수에는 중앙 흑진을 깨고 싶은 욕망과 흑A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다. 이때 슬그머니 171이 놓였다.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이 수가 실은 폐부를 찌르는 호착이었다.

▶ 참고도

'참고도' 백1로 받으면 보통이다. 그러나 이 한 수의 교환으로 중앙이 막혀버린다는 게 문제다. 흑은 2로 집을 지어도 되고 B쪽부터 선수해도 된다. 백 필패의 그림이다.

이세돌은 172로 반발했다. 이세돌다운 파격적인 결단이다. 그 바람에 173,1 75로 뚫려 초반에 건설해둔 40집짜리 옥토가 무참히 갈라졌다. 아마도 집의 절반은 사라졌을 것이다. 백은 그 대가로 중앙을 선수로 지운 뒤 C를 차지하여 승부하고자 한다.

한데 눈을 깜박이고 있던 이영구가 177을 선점해버리는 것 아닌가. 178로 공격한다. 여기서 수가 없으면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박치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