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명예의 전당(30) - 미키 맨틀(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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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시즌이라면 월드시리즈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1968년까지의 메이저리그 역사는 필연적으로 이에 걸맞는 영웅을 탄생시켰다.그리고 그 영웅은 뉴욕 양키스의 미키 맨틀이 되어야 할 것이다.과연 어느 누가 맨틀을 언급하지 않고서 월드시리즈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맨틀이 월드시리즈 역사에 남겨 놓은 발자취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기에 사실상 이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1950년대 이전 양키스의 야구 영웅들을 이야기하라면 팬들은 당연히 베이브 루스,루 게릭,조 디마지오 등을 언급하게 될 것이다.맨틀은 바로 이들을 이어 양키스 왕조의 전통을 세웠던 인물이다.1951년 양키스는 두 개의 운명적인 사건을 맞이한다.그것은 바로 56경기 연속 안타의 주인공이었던 디마지오의 은퇴라는 크나큰 상실과 함께 훗날 월드시리즈 역사상 최다 홈런(18개)의 주인공이 된 맨틀의 등장이었다.

그렇게 맨틀은 명문 양키스의 일원이 되었다.하지만 양키스 팬들은 처음에 맨틀을 환영하지 않았다.왜냐하면 디마지오가 양키스 팬들의 가슴 속에 묻어 놓았던 애정이 너무나 깊이 스며들어 있었기에 디마지오를 대신하여 양키스의 새로운 중견수가 된 맨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디마지오가 그랬던 것처럼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스위치타자라는 찬사로써 맨틀의 위업을 표현하듯이 결국 맨틀 역시도 양키스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미키 찰스 맨틀은 1931년 10월 21일 오클라호마 스파비노에서 태어났다.맨틀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포수였던 고든 "미키" 카크레인의 이름을 따랐다.

납 광부였던 맨틀의 아버지 머트 맨틀은 대단한 야구팬이었고 그 자신이 세미프로야구에서 뛰는 야구선수이기도 했다.그는 야구에 대한 사랑을 어린 시절 맨틀에게 전해 주었다.맨틀이 배트를 휘두르고 공을 던질 만큼 충분한 나이가 되자 아버지 머트와 할아버지 찰리는 맨틀이 방과 후 돌아오자 매일 공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오른손잡이인 머트와 왼손잡이인 찰리는 맨틀에게 공을 번갈아서 던져 줌으로써 맨틀에게 자연스럽게 스위치타격법을 가르치게 되었고 맨틀은 양손 모두를 사용하여 공를 때려낼 수 있게 되었다.맨틀은 여름 동안에는 납 광산에서 일을 하며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발전시킨 힘은 후일 그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긴 홈런을 때려내도록 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쯤 되자 맨틀의 능력은 또래들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였다.그는 야구뿐만 아니라 풋볼과 농구에서도 재능을 가진 타고난 운동선수였다.

1948년 양키스의 스카우트 톰 그린웨이드는 맨틀의 팀동료였던 3루수 빌리 존슨의 경기를 지켜 보기 위해 박스터 스프링스로 왔다.그리고 존슨과 같이 뛰었던 그 경기에서 맨틀은 야구장의 펜스 오른쪽과 왼쪽을 훌쩍 넘어 강에 빠지는 2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맨틀의 출중한 능력에 고무된 그린웨이드는 즉석에서 맨틀과 계약하기를 원했지만 맨틀이 겨우 16살 밖에 되지 않았고 여전히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1949년 맨틀이 졸업하는 해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그린웨이드는 정말 그 약속을 지켰고 맨틀은 캔자스 독립리그에 있는 양키스의 클래스 D 팀과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했다.

맨틀은 1100달러의 사이닝 보너스와 함께 잔여시즌에 대한 연봉으로 400달러에 계약했다.그것은 야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횡재 중의 하나였다.그린웨이드는 맨틀과의 계약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표현했다.“맨틀은 내가 이제까지 본 선수들 중에 가장 유망한 선수였다."

배길태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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