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성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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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때「키신저」미국무장관은 눈물을 흘렸다. 그의 손엔 편지한장이 들려져있었다. 프놈펜주재 미국대사에게 캄보디아의 한고위관사가 보낸 편지였다.
1975년 4월16일, 프놈펜 최후의 날을 이틀 앞두고 키신저는 이 편지를 미국상원에서 읽었다.
『…나는 미국이 자유를 선택한 국민을 포기하라고는 결코 생각해본적이 없었읍니다.…그러나 지금 이말을 기억해주십시오. 내가 이 사랑하는 조국에서 죽어간다해도 인간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는다는 비극이상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후일 그는「크메르·루지」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람은 절박한 상황에 이르면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 것같다.
아니 시인이 되기도 한다. 가장 진실한 언어와 가장 진실한 음성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때묻지 않은 고고한 한 편의 산문시와도 같다.
소련의 망명작가「솔제니친」도 암흑과 위협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르지 않았던들『「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나 『수용소군도』와 같은 명작들을 결코 탄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그는 절박한 상황속에서 비로소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바로 엊그제(19일)미국 워싱턴시에 주재하던 폴란드대사「스파소프스키」의 망명성명을 보며, 오늘의 폴란드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있는가를 뼈저리게 실감할수 있었다. 그도 어느새 한 외교관사의 경지를 넘어 한 서사시인이 되어있었다. 공산치하에서 외국대사를 다섯차례나 역임한 61세의 노련한 외교관.
『…아무도 3천6백만의 폴란드국민 모두를 투옥할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유럽의 한가운데 폴란드에서 노예로 만들 수 없습니다.』
폴란드도 다른 공산국과 마찬가지로 고급관사가 되면 안락과 호화를 법적으로 보장해준다. 많은 봉급과 예외의 특권은 식량배급을 받기위해 줄서는 일도, 한조각의 버터와 고깃덩이를위해 굶주린 개처럼 쏘 다니는 일도 면제시켜준다.
그런 혜택은 퇴직후에도 연장된다. 본인은 물론 직계가족, 부모·형제자매·손자까지도 연금을 받는다. 리무진차와 외래품구입 특권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스파소프스키」대사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자유를 선택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공산주의와 그 치하의 폴란드와, 자유를 외치다 좌절한 오늘의 사태가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알수 있다.
그의 비장한 망명성명은 바로 자유의 찬가이며 공산주의에 대한 저주의 절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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