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법·원칙부터 세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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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드라마 같은 대선 과정을 통해 집권한 현 정부가 임기의 절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서민의 정부를 자처했던 현 정부가 출범할 당시에는 많은 국민이 기대를 걸었다.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분당되는 과정에서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소추하자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와 대통령을 지키기도 했으며, 지난해의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에 과반의 의석을 주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은 우리 국민이 현 정부에 걸었던 기대와 희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현 정부의 정책이 본궤도에 올라야 할 시점인 현재에 와서는 오히려 국민들이 더 큰 실망을 느끼고 있다. 치밀한 계획하에 일관성 있게 추진돼야 할 국정이 혼란과 난맥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서민경제의 주름살은 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 난맥상에 국민들 실망

최근 문제가 되는 철도공사의 유전개발 의혹, 도로공사의 행담도 개발 의혹 등은 중요한 국정 사안들이 충분한 검토와 정책조율 없이 즉흥적 발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으며,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에 대해서는 잘못된 정책에 대한 고집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또한 정부의 교육정책과 부동산정책.지역균형개발정책, 심지어 외교정책과 안보정책에 대해서까지도 목표와 의지는 좋지만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에 기초한 아마추어적 실험작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이처럼 국정이 난맥상을 보이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국정 담당자들의 능력이 부족한가? 아니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탓인가? 야당의 비협조, 또는 국민의 정책에 대한 몰이해가 원인을 제공한 것인가? 유가 상승과 환율 변동, 북핵 위기 등 국제적 여건의 악화가 결정적인 원인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인가?

어떤 경우에도 불안요인은 있게 마련이다. 정치적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위기를 피하는 능력이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는 능력이다. 모든 위기를 피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국민을 설득해 국민의 힘을 결집하고,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지도자는 어떠한가? 현 정권은 과거에 비해 도덕성 측면에서 우월하다고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러나 무능한 도덕군자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국민이 믿을 수 있는 지도자라야 한다. 도덕성 측면에서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국민이 지도자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하고, 지도자가 제시한 방향으로 힘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악법보다 나쁜 '고무줄법'

그런 점에서 현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미 4.30 재.보선에서 국민이 여당을 신뢰하지 못함을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최근의 여러 의혹 사건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정부의 정책이 법과 원칙에 따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악법보다 더 나쁜 것이 '고무줄법'이라고 한다. 악법이라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않은 경우,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이 있으면 나름대로 법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제멋대로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적용되는 법은 아무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법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 정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의 합목적적 고려에 따라 정책이 법과 원칙을 벗어나게 되면 -설사 그것을 통해 얻는 바가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정책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궁극적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 정부가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는 것이 아닐까?

장영수 고려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