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6) 제76화 아맥인맥(5)|성당의 「상서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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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는 이당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하는 한편 화가가 되려면 글씨도 잘써야 겠기에 당대의 명필인 성당 김돈희선생이 지도하던 상서회에도 나갔다.
상서회는 을지로입구 지금 미국문화원 뒷골목 개천가에 있었다.
청계천의 지류인 이 개천 양쪽에는 조선기와집이 줄지어 섰고 개천을 연결하는 다리가 많았다.
둘쨋번 다리를 넘어서면 바로 개천가에 큰집이 있었는데 이집 사랑채에「상서회」란 간판이 붙어있었다.
이 집이 바로 단우 이용문의 집이다. 단우는 고종때 내부협판으로 오랫동안 궁중살림을 맡았뎐 이봉래의 아들이다. 그도 참령벼슬에 올라 권궁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단우는 서화에도 능해 선전에도 입선한 실력자일뿐 아니라 서화골등 수집가로도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성당이 서예지도를 하는 방을 마련해준 것이다.
성당은 지금 법원자리에 있는 중추원에서 글씨를 쓰는 서원으로 있었다.
그는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황산곡체를 잘써 일본인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상서회는 매주 금요일 하오3시에 모여서 1주일에 한번씩 글씨공부를 했다.
내가 입회할 당시는 회원이 10명밖에 안되었다.
대부분이 일본사람이고 한국인은 세사람밖에 없었다. 일본인은 모두 40대이상의 대회사 사장·중역들이었다.
인천의 조일양조장 사장(일본사람)도 나와서 서예지도를 받고 있었다.
한국사람은 소전 손재형과 이병학, 그리고 나뿐이었다. 성당은 일본사람에게는 일본말을 쓰고, 한국인에게는 한국말을 했다. 상서회에서는 내가 최연소자이고 늦게 입회해서 막내동이로 통했다. 먹갈이며 종이사는 심부름도 도맡아 해야했다.
나는 상서회에서 처음 소전을 알게되었다. 그때 내나이 21세였는데 소전은 나보다 10년위인 31세였다.
소전은 한복 바지저고리에 옥색마고자를 입고 있었다. 첫눈에 봐도 선풍도골이었다. 나는 속으로 참 잘 생겼구나하고 생각했다.
이병학은 체격이 크고 말수가 적어 좀 무뚝뚝한 사람같이 보였지만 인상은 퍽 좋았다.
성당은 키가 작고 몸집이 뚱뚱해 좀 뒤뚱거렸다. 목소리는 허스키여서 말할때마다 뚝배기 소리가 났다. 상고머리여서인지 꼭 모자를 쓰고 다녔다.
회원들은 상서회에 나오면 2간장방에 놓여있는 중국화류탁자에 원형으로 둘러앉았다.
이 화류탁자는 어찌나 큰지 열사람이 앉고도 여유가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이탁자는 단우가 중국에 가서 황실에서 쓰던 물건을 사울때 같이 들여온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문양도 좋고 튼튼했다. 성당은 상서회에 나와서는 두루마기를 벗고 아랫목에 앉아 체본을 써주었다.
큰붓꼭대기를 잡고 팔을 들고 한자 쓰고 옥판선지를 쭉 올리고, 또 한자 쓰고 옥판선지를 올리곤 했다.
성당은 글자 한자 쓰는 동안 숨을 안쉬고 쓰고나서야 숨을 모두어 쉬었다.
이렇게해서 각자의 수준에 맞게 차례대로 본체을 써주고 그걸 가지고 가 1주일간 집에서 연습해 오도록 했다.
나는 상서회에 처음 들어간날 여러사람앞에 붓글씨 시험을 보았다.
법첩을 내놓고는 써보라고 했다. 집에서 한문공부를 하면서 할아버지에게 배운대로 데검데검 써냈다. 성당은 내글씨를 보더니 『배운 글씨로구면』하고는 잘쓴다고 칭찬해줬다.
성당의 이 말에 용기를 얻어 나는 매주 금요일이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이 무렵 상서회원들은 모두 남대문등에 있는 영인창지물포에서 비싼 화선지나 옥판선지를 사서 쓰고 있었다.
성당은『출품하는 것도 아니고 연습하는데 이렇게 비싼 종이를 쓸게 뭐있느냐』고 싼종이 파는데를 가르쳐줬다.
마포형무소에서 죄수들이 만드는 종이가 있었다. 발자국은 있었지만 먹이 잘 먹어 글씨연습하는데는 별지장이 없었다.
회원들의 돈을 모아 내가 전차를 타고 지금 마포아파트자리에 있던 형무소에 가서 종이를 사왔다.
철문밖 수부에서 『종이 사러 왔다』 고 의장을 치면 옆문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형무소에 들어가면 종이 말고도 죄수들이 만든 물건들이 많았다.
나는 한번에 몇축(1축=1백장)씩 사가지고 낑낑거리면서 걸머지고와 회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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