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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로 끝난 미유학|생활적응 못하자 정신이상 귀국후 아들과 분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미국에 유학가 박사코스를 밟던 경제학도가 미국사회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나머지 정신이상증세를 일으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가 분신자살 했다. 3일 상오11시30분쯤 서울수유동 419의29 황정주씨(45)집 연탄창고에서 황씨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외아들 성식군(1)과 함께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모두 숨졌다.
황씨의 어머니 김옥례씨(74)에 따르면 아들이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면서『미국사람이 나를 잡으러 온다』고 소리치며 대문을 잠가 밖에서 30분쯤 기다리던 중 연탄창고에서 연기가 솟아 달려가 보니 황씨가 손자와 함께 중화상을 입은 채 껴안고 숨져있었다는 것.
황씨의 부인 김명희씨(36)는 남편의 쾌유를 비는 40일 동안의 금식기도를 위해 3주일전 기도원에 가고 집에 없었다.
숨진 황씨는 서울K고를 졸업, 서울J대학에 진학한뒤 곧 미국오하이오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경제학을 전공, 신시내티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계속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중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최근 귀국했다.
황씨는 귀국후 한때 대학강사로 나가기도 했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차도가 없어 그 동안 집에서 요양중이었다.
고교시절부터 영어에 남다른 취미를 갖고있던 황씨는 J대학 2학년때 군에 입대해 복무중 유학시험에 합격, 재대 이틀만에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주립대학 경제학과에 장학금을 얻어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의 기쁨도 잠시뿐 갖가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황씨는 부인 김씨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토록 자신했던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강의를 알아들을 수 없다. 또 1주일에 2백∼3백 페이지씩 독파해야 하는 과중한 숙제부담이 어깨를 짓누른다』고 유학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해 왔다는 것.
그러나 국내에 남아 화장품 행상을 하면서 남편의 학비뒷바라지를 해온 부인 김씨는 그때마다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황씨는 이러한 아내의 격려에 힘입어 대학코스를 마쳤고 석사과정은 신시내티대학으로 옮겨 비교적 짧은 기간인 3년만에 학위를 획득했다.
그러나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더 큰 장벽이 생겼다. 그 동안 틈틈이 부쳐온 학자금 송금으로 가세가 기울어져 도리어 홀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부쳐야 할 입장이 된데다 황씨의 유일한 수입원인 조교 노릇도 학생들이 황씨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수업 받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생각다 못한 황씨는 청소·트럭몰기·음식점종업원·골프장 캐디등 흔히 미국대학생들이 갖는 아르바이트를 얻으려 했으나 미국의 경기후퇴와 함께 자리가 있어도 백인학생을 주로 고용하는 바람에 황색인종에게는 취업기회가 드물어 당장 학비조달과 생활마저 이어가기가 힘들게 됐다.
공사장 인부 일은 비교적 얻기 쉬웠으나 신체적 조건으로 백인들을 따라갈 수 없어 취업하루만에 해고되기도 했다.
황씨의 주위 사람들은 학교에서의 무거운 과제와 생활고, 인정이 통하지 않는 이웃과 교수, 동료학생들의 철저한 개인주의, 홀어머니의 생활걱정등 이러한 복합적인 여건들이 황씨의 머리를 압박, 차차 정신분열증으로 발전한 것 같다고 말했다.
황씨는 요양치료도 못받은 채 짓눌리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병세가 악화, 학생과 교수간에 『황씨가 좀 이상하다』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황씨는 수업시간에도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미국놈이 나를 죽이러온다』며 한국말로 고함을 지르며 문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는 것. 국내에 있던 가족들도 3∼4개월에 한번씩 오던 황씨의 편지가 뜸해지면서 어쩌다 부쳐온 편지도 내용이 이상해 의아하게 생각했다. 결국 황씨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도 받지 못한채 병만 얻어 귀국했다.
왕씨는 77년 부인 김씨와 중매 결혼했으나 내성적 성격으로 집안살림은 부인 김씨가 화장품외판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꾸려나갔다.
남편과 외아들의 비보를 듣고 3일 밤 집에 돌아온 부인 김씨는 금식기도로 몸이 허약해져 기진맥진한 모습으로『자신을 희생해 남편을 성공시키려 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며 애통해했다. <한천수·신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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