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보기] 원칙주의자 최병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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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은 문제에 접근하는 첫 열쇠다. 그것이 안 통할 때 파격과 변칙이 동원된다. 오늘의 노무현은 파격이 만들었다. 그것이 권력을 창출했다.

그러나 지금의 노무현은 원칙을 내세운다. 새 권력은 새 질서를 만들었다. 그것을 지키는 게 원칙이라 보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그의 원칙주의는 그 때문에 변칙일 수 있다.

*** 병역면제 유혹 뿌리쳐

최병렬. 한나라당의 원칙주의자다. 그가 대표 경선에 나섰다. 노무현의 변칙적 원칙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란다. 변칙이 원칙을 만들 수 없다는 주장이다. 원칙은 원칙에서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것이 보수란 것이다. 개혁적 보수도 그래서 가능하단 얘기다.

그가 부산고등학교 3학년 때다. 병역신검이 안 나왔다. 이유를 알아본즉 시청 병사계 직원인 친척 형이 알아서 면제를 시켜줬다. 최병렬은 그 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군대에 가겠다 했다. 결국 이듬해 입대를 했다.

최병렬의 12대조는 최영경이란 선비다. 조선중기 성리학자 남명 조식의 제자였다. 그는 남명을 따라 지리산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다. 최영경이 후손에게 명한 원칙이 있다.

과거(科擧)를 보지 말고 지리산에 은둔하라는 것이었다. 3백년간 그 원칙이 지켜졌다. 해방이 되고 세상이 바뀌었다. 빨치산도 준동했다. 그때서야 최병렬은 아버지를 따라 하산했다.

정치인 최병렬이 지키는 원칙이 있다. 계보정치를 배격한다. 사람을 모으지도 사람 속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받지도 주지도 않는다. 때문에 따르는 자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베풀지 않는다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최병렬은 모든 비난을 감수한다. 원칙을 위해서란다.

일부 진보세력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수구골통'. 강성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은 부인한다. 원칙주의가 그렇게 비춰졌단 것이다.

노동장관 시절이었다. 현대자동차 노사분규가 있었다. 불법파업이었다. 그러나 총리는 정부 개입을 불허했다. 대선에 출마하려는 정주영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최병렬은 사표를 냈다.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다른 분규 현장엔 경찰이 투입됐었다. 사표는 하루 만에 반려됐다. 그러자 곧바로 경찰을 투입했다.

서울시장 재임시 그가 제시한 시정 운영의 원칙이 있다. 이른바 접시론이다.

"접시를 닦다가 깨뜨리는 건 용서한다. 그러나 깨질까봐 닦지 않는 건 용서할 수 없다."

사람을 다루는 그의 원칙이다. 부하의 양심을 믿는 게 상사의 양심이라 믿는다.

그가 생각하는 야당은 원칙있는 야당이다. 싸울 건 싸우되 도울 건 돕는 거다. 정권은 싸워서 뺏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할 때 헌신적으로 돕는 것도 또 다른 원칙이란 주장이다. 그것이 국민을 향한 충성이란 논리다.

*** 차기 '킹메이커' 희망

그는 대권엔 관심이 없다. "5년 뒤 내 나이 69세요"란 말로 선을 긋는다. 대신 킹메이커가 되고자 한다. 원칙있는 지도자를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그러나 원칙 지상주의가 갖고 있는 함정도 있다. 경직이다. 경직은 변칙이나 파격보다 못할 수 있다. 이회창의 실패도 경직 때문이다. 정치란 원칙을 뛰어넘는 공간이다.

정치가 세상을 등질 순 없어서다. 끊임없이 변하는 게 세상이다. 원칙도 그 변화를 막을 순 없다. 변화를 따라가야 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원칙의 정치가 아닐까 한다.

이연홍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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