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잡한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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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얼마전 스케치여행차 주왕산을 다녀온 적이 있다. 후미진 곳이라 고속버스·특급열차·호텔 등 문명의 이기와 접할 수 없어 때론 매우 불편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짜증스러운 마음은 차츰 가시기 시작했다. 오히려 인적이 뜸해 마냥 조용한 자연과 곳곳에서 만난 순박한 인정에 마음이 한껏 풍성해질 수 있었다.
그때 우리가 달리던 시골길 주위에는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감나무들이 온통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밀집된 주황색점들의 부르짖음과 이 소란을 여유있게 포용하고 있는 파아란 가을하늘에 매료되어 나는 넋을 놓고 시골버스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와르르』하는 요란한 소리와『어머나』하는 비명에 돌아보니 감 자루가 풀어진 채 버스바닥에는 감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감 임자인듯한 아낙네는 당황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감을 주워담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우리 학생들은 도와 줄 엄두도 못내고 단지 기사와 차장이 짜증을 내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만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빗나갔다. 차장은 감 줍는 일에 합세했고 기사는 차를 길가 한쪽에 스르르 멈추어 감 줍는 일을 쉽게 해주고 있었다.
그것도 무언의 동작으로…. 흐뭇하여 참 좋은 사람이구나 감탄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학생이 한마디 기사에게 던진다. 『멋있는 아저씨네요』라고. 우리는 감에 완전히 취하고 싶어 감을 몇개 사서 기사한테도 권하면서 진정 맛있는 감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 우리들의 삶이란 것이 닳아질대로 닳아져서 이젠 그저 피곤하기만 한것같다. 서로의 아귀다툼, 수렁같은 불신풍조로 고장난 신경은 음악으로도 매만져지지 못해 허허로운 이때 이러한 어수룩한 인정들과 만나게 되면 다시 용기를 갖게되어 인간회복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하여 희망을 꿈꾸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서울의 시내버스에 옮겨 놓는다면 어떠할까? 똑똑한 차장은 아예 감 자루를 차에 올려주지도 않았겠지만 혹시 올려놓았다면 감 주인에게 큰 면박을 줄 것에 틀림없다. 이러한 나의 생각도 도시생활에 메말라진 나 자신의 그릇된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끔 타는 시내버스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흔들리다가 미처 잔돈을 준비하지 못해 나이어린 차장의 핀잔을 여러번 들은 적이 있는터라 착각만은 아닌 것 같다.
현대생활의 각박함이 우려의 신경줄을 팽팽하게 하고 인정을 메마르게 유도하고 있지만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믿고 조금은 바보스럽게 사는 지혜를 익혀 나가야 될것같다. <숙대교수·동양화가>
▲56년 서울대 미술대졸▲65년 국전동양화부문교부장관상수상▲현국전초특작가 및 심사위원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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