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랑스 대표작가, 뭔가 통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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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언젠가 소설가 황석영(62)씨는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65)를 꼭 한번 만나야겠다"고 말한 적 있다. 그러더니 "아마 나는 한국의 클레지오일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전쟁부터 베트남전쟁, 군사정권, 그리고 방북에 이르기까지 황석영이란 인물은, 그가 살아온 인생과 발표한 작품들은 굴곡 심한 우리네 현대사를 빼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 클레지오는 다르다. 그는 1960년대 실존주의가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장악했을 때 강렬한 이미지와 자유분방한 문체로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현재 프랑스 문단에서 가장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작가로 통한다. 또 도통 언론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도피 작가'로도 유명하다.

마침 이 둘이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좌담회를 준비했다. 그리고 21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프랑스 작가는 마중나온 포럼 관계자에게 물었다. "미스터 황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둘이 24일 본지에서 조우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시간 예정의 좌담회는 턱없이 짧았다.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초면이었지만, 작품을 통해서는 진작에 구면이었다. 통역은 이대 통역대학원 최미경 교수가 맡았다.

황석영=난 클레지오보다 세 살 어리지만 등단은 한해 이르다(황석영은 1962년 '입석부근'으로, 클레지오는 63년 '조서'로 등단했다). 동년배 작가로서 은근히 경쟁심 같은 걸 느꼈다. 그때 클레지오가 시도한 새로운 문체와 서술기법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난 일제시대 만주에서 태어났고, 내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을 때 클레지오가 인근의 태국에 거주한 사실도 안다. 2003년 '심청'을 발표하고 클레지오의 '황금물고기'를 읽었는데 작품의 구도와 문제의식이 너무나 닮아 많이 놀랐다.

르 클레지오=듣고 보니 우리는 정말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난 67년께 알제리 전쟁 참전 대신 태국에서 자원봉사를 해 병역을 대신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때 난 심오한 정신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절에 들어갈까도 고민했다. 난 생각에 그쳤지만 황 작가는 실행에 옮겼다. 또 황 작가의 '무기의 그늘'은 전쟁에 관한 내 생각과 일치한다. 전쟁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코미디 같은 것이다. 그 소설에서 난 황 작가가 여느 참여작가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제도에 사람이 휘둘리는 게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황 작가는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황=클레지오의 '아프리카인'을 보면 지은이의 이방인 의식을 느낄 수 있다. 가끔 그가 서구인인지 동양인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특히 클레지오가 23일 포럼에서 발언한 대목은 뜻깊은 것이었다. 그는 '나의 조국은 프랑스도 아니요 영국도 아니다. 내 조국은 프랑스어다'고 했다. 뚜렷한 작가의식을 읽을 수 있었다.

클레지오=지구는 둥글다. 그리고 회전한다. 유럽은 서쪽일 수 있지만 동쪽일 수도 있다. 인터넷 등 새로운 통신수단이 개발되면서 가치 판단은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황 작가의 '손님'은 중요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여러 문제를 제기한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 믿는다는 행위, 선악의 경계 따위의 문제를 이 소설은 한국적인 것 안에서 풀어낸다. 한국에서 샤머니즘은 신학과 철학의 문제인 듯 보이고 이는 결국 가족의 차원에서 당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황=맞다. 그러나 난 세계시민이 되겠다고 말한 적 있다. 내 문학을 가지고 세계에 관여하겠다는 것이다. 그건 훨씬 더 자유롭게 소통하겠다는 뜻이고. 오늘 만남은 새로운 소통의 장이 될 것이다.

황 작가야 늘 활기가 넘치는 인물이다. 좌담회 때도 예의 연설투 화법을 놓지 않았다. 반면 클레지오는 침착한 편이다. 그러나 다양한 손짓과 예민한 표정에서 감수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서인가. 황 작가는 클레지오를 만난 소회를 "나이는 형인데, 영 소년이네, 만년 소년"이라고 남겼다. 좌담회를 지켜본 문학동네(클레지오 저작 7권을 번역.출간한 출판사) 강태형 사장이 한마디 했다. "간만에 서로를 알아보는 상대를 만난 자리였다. 이런 걸 내공이라고 하나. 처음엔 서로 많이 달라보였는데 막상 이렇게 뜻을 같이 하다니 참 놀랍다."

글=손민호,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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