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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처분' 아이들이 오히려 감사편지 보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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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문선주 판사

“판사님이 저를 용서하고 내보내 주셨다면 지금쯤 전 교도소에 있지 않았을까요. 그때 받은 10호 처분은 제겐 ‘절호의 찬스’였다고 생각해요. 사랑합니다.”

 지난 7월 인천지법 소년 1단독 문선주(36) 판사 앞으로 이런 내용의 편지가 배달됐다. 채팅으로 만난 남성을 “강간당했다”고 무고해 지난해 10호 처분(소년원 2년 송치)을 받은 김영미(가명·17세)양이 쓴 것이다. 10호 처분은 소년범에 대한 가장 엄중한 처분이다. ‘소년범 무기징역’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문 판사가 10호 처분을 내린 아이들은 얼마 후 오히려 감사의 편지를 보내곤 한단다. 이유가 뭘까.

 소년보호재판은 10~19세 미만 소년들이 저지른 범죄사건을 다룬다. 일반 재판과 달리 소년범을 보호하는 1~10호 처분이 내려진다. 지난해 3월부터 소년보호재판을 맡고 있는 문 판사는 ‘10호 처분을 많이 내리는 판사’로 소문이 나 있다. 대신 처분을 내릴 때마다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준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10호 천사’. 그는 “10호 처분을 받은 아이들이 처음엔 울면서 애원하지만 처벌이 아닌 보호를 위해서라고 설득하면 언젠간 깨닫더라”고 말했다.

 문 판사의 진심은 김양과 같은 아이들이 쓴 감사편지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들이 쓴 편지를 빠짐없이 스크랩북에 보관하고 있다. 이미 두꺼워진 스크랩북엔 재판 당시 아이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가 적혀 있다. 문 판사는 이 스크랩북이 자신의 ‘보물 1호’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문 판사의 법정이 화기애애한 것만은 아니다. 눈물을 보이는 아이에겐 “우는 건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매서운 질책이 떨어진다. 응석은 통하지 않는다. 문 판사는 미혼이다. 법원 내 소년법정에서 흔치 않다. 소년범죄를 문제 해결의 시작점으로 봐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문 판사는 “아이가 혼자 못 버티겠구나 싶으면 유해한 환경에서 분리해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며 “소년범죄는 시기·환경이 바뀌고 심신이 성숙해지면 중단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일반 범죄와 구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인천 지역의 소년 본드 중독 문제 해결에도 기여했다. 지난 몇 년간 인천에선 청소년 본드 중독 사건이 빈발했다. 2011년부터 매년 300여 건의 본드 중독 사건이 발생해 왔다. 2012년 전임 심재완 판사를 중심으로 대책회의가 시작됐고 지난해 3월 문 판사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국가기술표준원, 인천시청, 민간단체 ‘세상을품은아이들’이 한마음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중독을 유발하는 톨루엔 성분 함량에 대한 규제를 시작했다. 인천시청은 본드 판매처에 19세 미만 공업용 본드 구입 금지 포스터를 배포했다. 문 판사는 본드 관련 고시 개정을 위해 국회까지 직접 찾아가 설득했다. 그 결과 지난해 인천의 본드 사건은 65건으로 대폭 줄었다.

 문 판사의 다음 목표는 청소년 성매매 문제 해결이다. 그는 “체계적인 통계가 없어 잘 잡히지 않는 유령 같은 사안이지만 연루된 아이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악질 범죄”라고 말했다. 지난 2일 문 판사는 안양소년원 등 유관기관과 청소년 성매매 근절을 위한 2차 대책 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토대로 올해 말부터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설 계획”이라며 각오를 다졌다. 

글·사진=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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