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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혁신 열쇠는 시민 … 이념 틀 뛰어넘는 시민교육 시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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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호 10면

지난해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았던 박재창 교수가 시민참여형 민주주의의 의미와 실현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그는 1시간30분 동안 쉼 없이 열변을 토했다. 정부·관료·정당·정치인에 대한 비판에 거침이 없었다.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라고 했다. 정보사회의 도래에 따른 변신에 실패했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면서 시민에서 대안을 찾자고 제안했다. 시민 참여정치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정부·의회 개조의 해법으로 삼자는 것이다.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국민이 처절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도 했다.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 4.0’ 개혁 주장하는 박재창 교수

지난해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박재창(66) 한국외대 석좌교수(행정학)의 진단이다. 그는 새누리당에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등 파격적인 제도 도입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실패’라고 자평했다.

그는 최근 정치 개혁안을 담은 『정치쇄신 4.0』이라는 책을 펴냈다. ‘민주주의 4.0 시대, 우리 정치의 혁신 방향과 과제’라는 부제가 달렸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4.0’은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정치체제를 의미한다. 그는 정부와 의회가 국민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은 “진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구식 정당으론 문제해결 불가능
-나라 걱정 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최근의 주요 사건들을 한번 보자. 세월호 참사, 제주지검장의 추태, 법무부 차관 성접대 의혹, 만취한 군사령관의 소동 등 충격적 사건들에는 공통된 특성이 있다. 예전 같으면 사건 경위를 국민이 속속들이 알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행정관료가 현장 상황을 상부에 보고하면 그에 따라 사건의 성질이 확정됐다. 현장 정보를 제한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 국민에겐 진상에 대한 다툼의 수단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경험했듯이 세월호 참사는 스마트폰 영상 등으로 초단위 기록까지 국민에게 공유됐다. 군사령관 만취 소동도 예전 같으면 그냥 해프닝으로 끝났을 사건이다. 그런데 시민들이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 공개함으로써 만천하에 실상이 드러났다.”

-국가가 정보를 통제할 수 없게 돼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처럼 느껴진다는 얘기인가.
“그게 아니다. 정보사회의 도래에 맞춰 국가와 정치체제도 진화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사회와 시민을 불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시민의 정보 습득·해석·판단 능력은 엄청나게 발달했는데 시민이 정치적 힘을 발휘하는 대의(代議) 과정은 형편없이 뒤떨어져 있다. 이 격차가 문제다. 정보사회 이후의 국가 경영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가지고 당면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결국 정치 개혁, 의회 개혁이 필요하다는 얘기인가.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해방 이래로 정치 개혁에 대한 얘기가 안 나온 적이 없었다. 확인해보니 16대 국회 이후에만 정치 개혁과 관련된 위원회가 30여 개가 생겨났다. 그런데 정치 개혁을 보는 패러다임의 교체는 없었다. 시각적 교정이 필요하다.”

관료적 질서 넘어 국가개조 필요
-현재의 정치·정당 체제는 왜 현실에 맞지 않는가.
“정당과 의회 자체가 구식 디자인이다. 정당정치가 전 세계에서 쇠퇴기를 맞고 있는 근본적 이유다. 미국에서는 의회가 성공적인 대의정치 기구로 평가받아 왔다. 그런데 지금 미국 국민도 정치에 대한 실망감을 크게 표출하고 있다. 정보사회에 구식 정당은 제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서구 정당은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개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양측은 보수·진보 두 개의 이념적 틀로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정보사회가 되면서 사회의 유동성·역동성·급변성에 기성 정당이 제 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됐다. 정책을 개발하고 대안을 내놓으면 이미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현실에 들어맞지가 않는다. 구식 정당으로는 문제 해결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정부·정당이 무능하게 보이는 것이 정보사회의 도래 때문인가.
“근대의 국가 경영은 전문가·엘리트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것이 행정국가의 기본적 모형이다. 국민이 실질적 참정권 행사 여부에 대해서는 그다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엘리트 관료가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국가 권력이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면 국민이 수동적으로 수용했다. 그런데 정보사회가 되면서 국가의 정보에 대한 배타적 독점체제가 무너졌다. 민간 영역의 정보 습득 능력 강화로 ‘권력 이동’이 발생했다. 국민에게 사회적·심리적 힘이 생겨났다. 자기 존중감도 커져 더 이상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산업사회에서의 국가 작동 시스템이 정보사회에 그대로 남아 있다. 국민 고충과 민원 발생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정부는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하나.
“정부는 더 이상 무결점을 주장하고 고집하면 안 된다. 그래 봐야 국민이 믿지도 않는다. ‘정부의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겸손해져야 한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부가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다’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개혁은 어떻게 보나.
“국가개조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는데, 그런 관료적 질서의 패러다임으론 해결이 안 된다. 국가안전처 설립이나 해양경찰청 해체를 한번 보자. 정부 내에서도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 수긍 안 하는 국민도 많다. 정부 내부 구조 변화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관계 재정립이 필요하다.”

시민이 ‘파괴적 혁신’의 원동력
-정부의 행정 개혁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나.
“요즘 공무원들은 일하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정부가 결정하면 국민이 따라가는 시대는 끝났다. 국민의 참여가 필요하다. ‘도로명 주소’ 도입을 보자. 큰돈을 들여 만들었는데 국민이 불편해한다. 행정 낭비적 요소도 있다. 창의적 행정 개혁과 거리가 멀다. 스마트폰 등의 기기로 위치를 검색하는 시대인데 한참 뒤떨어진 체계를 만들었다. 정보기술(IT) 전문가 등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방식으로 제도 개선을 모색했다면 훨씬 좋은 방식이 나왔을 것이다.”

-정치와 행정에 시민이 참여하면 일의 효율성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과거의 기계적 효율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한다. 어차피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일이 안 되고 있지 않나. ‘파괴적 혁신’을 해야 하는데 공무원의 머리에 의존할 수는 없다. 화물 수송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마차에 말을 더 많이 동원하는 것은 혁신이 아니다. 증기기관차를 만드는 것이 혁신이다. 그런 새로운 해결책은 공무원이 아닌 시민이 찾아낸다.”

-시민의 정치 참여를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가장 시급한 것이 학교와 사회에서의 민주시민 교육이다. 시민을 협력적 동반자로 준비시키는 교육을 말한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에는 오래전부터 일상화된 과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보수 쪽에서 이를 도입하려 하면 진보 쪽이 과거형 ‘국민교육’을 하려 한다고 반대한다. 진보 쪽에서 하려 하면 보수 측에서 ‘의식화 교육’을 하려 한다고 막는다. 그런 정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문제의식조차 없어
-정치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해야 하나.
“국가와 시민사회가 협력적 공조체제를 이뤄야 한다. 투표에서 이긴 쪽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과의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협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정책 수요의 진단, 대안 개발, 효과의 평가 등 각 단계마다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열린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정부를 떠올리게 한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에 대한 인식은 있었다. 하지만 실현 과정에서 실패했다. 국민과 함께하는 정부를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노조와 시민단체 지도자가 비공식적으로 통치 과정에 참여하는 조악한 형태의 ‘조합주의’ 정도만 있었다. 시민의 일상적 참여는 이뤄지지 않았다. 문제의 공유와 협력을 위한 담론의 장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이후의 상황은 어떻게 진단하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는 문제의식조차 없다. 산업사회적·관료국가주의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행정관료 중심으로 문제를 다루니 국민에게 수용이 안 된다.”

-‘식물 국회’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의회 마비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정당정치의 문제는 무엇인가.
“고전적 대의 구조는 한계에 봉착했다. 정당이 시민과 대화를 하면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지난해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지만 개혁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실패였다. (새누리당이)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패러다임을 바꿔보려고 현역 의원을 한 사람도 위원회에 포함시키지 않고 전원을 외부 인사로 채웠다. 당내 인사 중 여러 사람이 그것을 적대적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정치 개혁은 어떤 형태든 기득권의 축소나 변동이 불가피하다. 기득권을 가진 정치인들은 개혁에 나서기가 어렵다. 결국 정당 스스로의 개혁은 소수 엘리트에 의해 장악된 기성 정치권의 이해에 봉사하는 범위 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안철수 의원, ‘안철수 현상’ 본질 몰라
-그럼 정치 개혁, 정당 개혁은 어떻게 이룰 수 있나.
“국민이 처절하게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의 가열한 투쟁 없이 이루어진 정치 개혁은 거의 없다. 보통 사람들이 일어나야 한다. ‘국민운동본부’ 같은 것이 만들어져야 한다. ‘안철수 현상’은 그런 국민 운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안철수 의원은 그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상태는 어떻게 보나.
“비상대책의 일상화가 진행 중 아닌가. 본인들이 무엇이 문제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것 같다. 그들 역시 엘리트 중심의 ‘올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사일 시대에 활로 국민 마음의 과녁을 맞히려는 격이다.”

-정부나 정당이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하나.
“국회의원 국민소환제와 전자 국민창안제 같은 것을 우선 도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유권자가 의원소환제로 국회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력을 갖는다면, 의원들은 타협과 조정으로 의회의 생산성을 높이게 된다. 또한 책임정치의 가능성이 커진다.”



박재창 1948년 충남 서천 출생. 서울고·한국외대(정치학과) 졸업. 뉴욕주립대 행정학 박사. 숙명여대 명예교수, 한국외대 석좌교수. 아태 YMCA연맹 회장,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 위원장.

이상언 기자 joo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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