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150만원 변호사 두고 … '사무장 사장님'이 소송 장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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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A법무법인. 겉으로 봐선 여느 로펌과 다른 게 없다. 홈페이지엔 명문대 출신 변호사의 경력이 소개돼 있다. 하지만 이곳은 사무장이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이른바 ‘사무장펌’으로 소문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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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가 전화를 걸어 “변호사와 상담하고 싶다”고 물었다. 50대 사무장은 “변호사님은 재판 때문에 바빠서 수임을 해야 상담할 수 있다”며 “우선 나와 얘기하자”고 했다. “술 마시다 싸움이 나서 폭행으로 고소당했다”고 하자 “형사사건은 갑자기 송치되니 일단 빨리 사건을 맡겨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변호사가 몇 명인지, 누구와 상담해야 하는지 물어봐도 “선임 계약부터 하라”고 채근하다 전화를 끊었다.

 변호사 업계 불황 속에서 사무장펌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해마다 배출되는 변호사가 급증하는데 사건은 줄면서 경쟁이 치열해진 까닭이다. 대한변호사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24일 2만 번째 변호사가 탄생했다. 현재 활동 중인 변호사만 1만4980명이다. 2007년 개업변호사가 8143명이던 것에 비해 80% 넘게 늘었다. 앞으로도 매년 2300여 명의 로스쿨 출신 변호사가 배출된다.

 반면 서울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한 명이 연간 수임하는 평균 사건 수는 2009년 32.8건에서 지난해 24건으로 27% 줄었다. 최근엔 한 달에 한 건도 수임을 못하는 변호사들이 늘다 보니 수완 좋은 사무장들의 힘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일부 로펌에선 사무장이 “사장님”으로 불린다. 여러 변호사와 동업 계약을 맺고 갓 등록한 변호사는 고정급을 주고 직접 고용한다. 1년간 월 150만원을 받고 A법무법인에 고용됐던 이모 변호사는 “계약까지 사무장이 다 하기 때문에 의뢰인은 대부분 법정에서 처음 만났다. 가망 없는 사건까지 마구 수임해 할당하는 바람에 전패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무장펌은 아니더라도 변호사들이 사무장에게 의존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개업 8년째인 김모 변호사는 “서초동 변호사 3명 중 1명은 사무장에게 수수료를 주고 사건을 받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전했다. 반대로 사무장이 변호사에게 수수료를 주고 명의를 빌리는 경우도 있다. 사무장 정모(54)씨는 변호사에게서 명의를 빌려 개인회생 사건 전담팀을 운영한 혐의(변호사법 위반)로 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6년간 948건의 파산·면책 신청 사건을 수임해 10억여원을 벌었다.

 피해는 고스란히 의뢰인에게 돌아간다. 공장에서 사고를 당한 중국동포 조모(28)씨는 2010년 5월 로펌 사무장 김모(52)씨와 상담한 뒤 착수금 400만원을 김씨 계좌에 입금했다. 진행 상황을 물어볼 때마다 김씨는 “소송이 잘 진행되고 있으니 돈 받을 준비만 하라”고 답했지만 소송 제기 시한(3년)이 지나도록 소장조차 접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사무장펌에서는 문서 위조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해 7월 개인회생사건 2000여 건을 맡아 16억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기소된 사무장 전모(58)씨는 의뢰인의 막도장을 파 증빙서류를 위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중앙지법 양민호 판사는 “사무장의 권유로 채무자가 부당한 방법을 시도하다 회생 신청이 기각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사무장펌을 근절하려면 의뢰인이 참고할 수 있도록 변호사 정보를 공개하고 변호사단체에 등록되지 않은 사무장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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