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흔든 시 한 줄]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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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누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 홍사용(1900~47) ‘나는 왕이로소이다’ 중에서

어릴 때 아버지께서 종종 읊으시던 시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참 이상한 시도 다 있다 하면서도 그 비통한 어조가 가슴에 남았다. 나중에 이 시가 일제 강점기에 홍사용이라는 시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와는 별 상관없는 시였다.

 세월이 흘러 나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눈이 떠졌다. 이때부터 이 시를 혼자 낭송하며 달구똥 같은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울고 싶을 땐 일부러 꺼내 읽는다. 어린아이 같은 울음이 고난을 이길 힘을 준다는 것도 이 시를 통해 알았다.

 눈물의 왕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왕으로 태어났으나 세상에서 홀대를 받고 있는 한국민의 한과 설움이다. 우리는 진정한 슬픔 가운데 하나가 된다. 너도 나도 다 눈물의 왕이라는 걸 알고 나면 적의와 경계심이 사라진다. 눈물의 왕들이 눈물 대신 악을 쓰기에 세상이 이토록 팍팍한 게 아닐까 싶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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