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중간이 없는 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이정재
논설위원

중산층은 ‘경제를 떠받치는 허리’로 불린다. 사람이든 나라든 허리가 튼튼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게 기운 쓰며 살 수 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지난 20여 년간 대한민국 중산층은 쪼그라들기만 했다. 1990년 우리의 중산층 비율은 75%였다. 그러던 게 2013년엔 65%로 줄었다. 그나마 이 숫자는 통계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따진 것이라 제법 높게 나온 편이다.(중산층 65%란 숫자는 사실 국민 체감과는 동떨어져 있다. 중산층은 통계로 구분하기보다는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의식’이 더 중요한데 ‘내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지난 6월 현대경제연구원 조사 결과 46.4%에 그쳤다.)

 왜 그런가. 정부·정치권·기업이 말로만 “중산층을 살리자”고 외칠 뿐 막상 정책과 주장은 엉뚱한 것을 내놓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복지 담론이 세상을 휩쓴 몇 년 전부턴 ‘중산층 재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다. 하기야 언제부턴가 우리는 ‘목소리 크면 이기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거리와 광장을 장악한 ‘생계형’이나 돈으로 권력을 부리는 ‘갑부형’의 큰 목소리에 묻힌 중산층의 신음소리야 들릴 턱이 있겠나.

 당장 요즘 증세 논란이 붙은 담뱃세와 자동차세를 비교해보자. 담뱃세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많고 크다. 정치권까지 적극 가세해 결사반대를 외친다. 이른바 서민의 낙을 뺏는 ‘생계형’ 증세니 안 된다는 거다. 반면 자동차세는 어떤가. 담뱃세 반대에 끼워주는 깍두기 신세다. 차 굴리고 살면 중산층, 살 만한데 뭘, 하는 정서가 깔려 있다. 담뱃세 반대에 열 올리는 것과 비교하면 역차별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어디 이런 사례가 하나둘이랴.

 세금은 어떤가. 진작부터 중산층이 봉(鳳)이다. 직장인 셋 중 하나는 ‘생계형’이란 이름으로 한 푼도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지난해 근로소득자 1577만 명 중 면세자는 516만 명(33%)이었다. 그럼 갑부형은 어떤가. 최고 세율이 38%를 넘지 않는데 대상도 고작 12만 명뿐이다. 그뿐이랴. 국세청과 싸워서 이기는 것도 갑부형이다. 지난해 세금 반환 소송 중 50억원 이상 갑부형 건에선 국세청이 두 번 중 한 번꼴로 졌다. 반면 1억원 미만의 중산층 건은 국세청이 열에 아홉 이겼다. 유전무세(有錢無稅), 무전유세(無錢有稅)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심지어 요즘 들어선 재테크도 중산층이 왕따다. 금리가 사상 최저, 연 1%대로 떨어졌는데 세금 혜택은 서민·고소득 층에만 집중돼 있다. 지난달 정부가 내놓은 세법개정안을 보자. 재형저축은 연봉 2500만원 이하만 들 수 있는데 의무가입 기간을 7년에서 3년으로 낮춰줬다. 서민용 선물이다. 물론 부자들 것도 따로 챙겨줬다. 금융소득 종합과세 때 배당소득에 분리과세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반면 중산층엔 주기는커녕 되레 있던 혜택도 줄였다. 그나마 중산층이 주로 돈을 굴리던 세금우대종합저축을 비과세종합저축으로 통합하면서 가입 자격을 61세 이상으로 확 높였다. 생계형에 중산층행 사다리 놓는 것만 신경 썼지 중산층이 도로 생계형으로 굴러떨어지는 건 애초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주택 정책도 서민용 임대주택과 고소득자용 강남 재건축 위주다. 중간 생략하고 잘라 말하면 재건축 활성화는 중산층의 돈을 부유층에게 빠르게 옮겨주는 효과가 탁월하다. 강남 재건축 아파트값이 오르면 이득은 갑부형에게만 대부분 돌아간다. 중산층이 주로 소유한 ‘변두리’ 아파트는 강남 아파트보다 상대적으로 덜 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건축은 전세난을 부추긴다. 전셋값이 오르면 죽어나는 건 빚내 전세금 마련하는 중산층이다.

 너무 적으면 패악해지기 쉽고, 너무 많으면 교만해지기 쉽다. 중산층은 중도다. 둘로 갈린 우리 사회 통합엔 두터운 중산층이 약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제 배 불러야 남의 배도 챙기는 법이다. 복지 정책이 우파에서 시작된 이유다.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막상 정책은 엇박자요 세상은 거꾸로 간다. 큰일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