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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융합' 주도할 시스템 갖추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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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백범일지'에 있는 김구 선생의 말씀이다. 언뜻 보기에 백범의 이 간절한 소망이 요즘 드디어 이룩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일본.중국.동남아에서 한류 열풍이 뜨겁고, 유럽 영화제에서도 한국 영화가 감독상을 타는 시대가 도래했으니 말이다. 독일만 보더라도 오는 9월 베를린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주간'에 한국이 '포커스 국가'로 지정되어 있고, 10월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는 '주빈국'으로 선정되어 현재 우리 문화를 알리려는 각종 행사가 준비 중이다.

그러나 학계.문화계에 종사하는 지식인들의 심정은 불안하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그 이유는 우리 문화 생산품 중 일부 품목이 그동안 상당한 수준과 질을 확보했고 그중에는 세계적 보편성에 도달한 것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성과가 대개는 문화산업 종사자 개인의 재능과 신명, 그리고 한국인 특유의 순발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을 뿐 우리가 과연 앞으로 이런 한류 바람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해 나갈 만한 인문학적 역량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자문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축적된 인문학적 역량이 있어야 다양하고 심화된 복합 문화 콘텐트를 연구.개발할 수 있으며, 그런 거국적 융합시스템 아래서만 국제무대에서 한국 문화 상품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대학의 인문학은 아직 분과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통을 겪고 있으며, 디지털시대에 부응하는 '학제.융합적 문화연구'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소위 '인문학의 위기'라 하여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 왔는데 인문학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너무 소홀했다는 원인 분석도 제기되고 있으며, 디지털시대를 맞이해 인문학자들이 현실 적응을 게을리했다는 인문학 내재적 요인도 따갑게 지적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국가와 사회, 그리고 정부는 인문학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막연히 인식하면서도 당장의 가시적.전시행정적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장기간의 인내심 있는 투자가 필요한 인문학은 언제나 찬밥 신세로 희생시켜 왔다. 평소 번역과 번역가를 홀대하다 갑자기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내놓을 양질의 번역 작품을 요구한다고 해서 어찌 하루아침에 좋은 작품을 진상할 수 있겠는가.

인문학자라고 해서 바보가 아닌 이상 왜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고 싶지 않겠는가. 각 분과와 장르의 연구 및 교수 내용을 새로이 검토하고 서로 담을 허물어 각 분과 학문이 마음을 열고 학문적 핵융합을 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왜 못 느끼겠는가. 문제는 그런 신명나는 마당을 국가가 한 번이라도 만들어준 적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가칭 '인문정책연구원'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과학기술 진흥에는 일찍이 많은 투자를 해오면서 국민생활의 윤리적 지표를 세우고, 문화산업 콘텐트의 추동력(推動力)이 되는 상상력의 보고(寶庫)인 인문학 각 분야를 조정.통합.진흥하는 기관은 왜 설립하지 않는가.

거대하고도 잡다한 조직으로 자체 생존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한국 대학 전체에다 인문정책을 막연히 방기해 놓지 말고, 정부가 미국의 '국립인문재단'처럼 인문학의 여러 분야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협력해 나가야 할지 그 방향을 선도해 준다면 이 땅의 인문학자들은 정말 신명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오랫동안 표류하고 있는 비교문학과가 어느 대학에, 어떤 형태로 설치되어야 바람직한지도 드러나게 될 것이고 현재 완전히 사각지대에 방기되어 있는 제2 외국어 교육의 합리적 개선방안도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고전과 서양 고전을, 그리고 전 세계 각종 최신 기술 정보를 어떻게 번역해 내야 할지 그 방안과 세부 계획도 나올 것이다. 설령 독도 사태 같은 것이 터지더라도 품위 없는 격정만 냄비 끓듯 마구 분출시키다가 대책 없이 잠잠해지는 대신 준비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0개 국어로 일시에 범세계적 대응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이 나라는 백범이 소망하던 대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세계적 문화국가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안삼환 서울대 교수독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