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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지갑 열 테니, 기술력 보여주오 … 한국 벤처 키우러 큰손들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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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 12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한국 벤처 투자설명회인 ‘비글로벌 2014’(beGLOBAL 2014). 이 행사에는 백스페이스를 누리지 않고 오타를 수정하는 솔루션을 선보인 ‘큐키’, 대용량 파일 전송 서비스 ‘센드애니웨어’로 유명한 ‘이스트몹’, 무료 모바일 인터넷전화 서비스를 선보인 ‘브릿지모바일’ 등 한국 스타트업(창업초기기업) 10여 곳이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며 미국 시장 진출을 모색했다. 미국의 벤처캐피털(VC), 엔젤투자사, 액셀러레이터(스타트업이 성장하도록 돕는 기관),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관계자 100여 명은 발표에 귀를 기울이며 이들의 아이디어와 기술의 특장점 등에 대해 꼼꼼히 메모했다.

 ‘서울을 실리콘 밸리로 가져오다’(Bring Seoul to the Valley)라는 주제로 열린 이 행사는 미래창조과학부·한국인터넷진흥원(KISA)·스타트업얼라이언스 등이 한국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 및 자금 유치 등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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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부 정한근 인터넷정책관은 “한국에 이스라엘과 같은 벤처붐이 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유망 벤처를 발굴하려는 해외 투자자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며 “직간접적으로 투자 의사를 밝힌 VC가 여러 곳”이라고 전했다.

 한국 스타트업에 대한 해외 투자자의 구애가 뜨거워지고 있다. 세계에서 통할만한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한국 스타트업들이 늘면서 한국에 투자 유치의사를 밝힌 세계적인 VC가 늘고 있는 것이다.

 17일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세계적인 VC인 DFJ와 월든인터내셔널은 중소기업청과 함께 각각 7500만달러(약 780억원) 규모의 ‘대한민국 벤처펀드’(가칭)를 조성하고 국내에 투자를 진행할 예정이다.

 운용 자산 70억달러(약 7조2300억원)로, 미국 5대 벤처캐피털 중 하나인 DFJ는 핫메일·스카이프·테슬라·바이두 등 세계적인 기업을 발굴했다. 설립자인 티모시 드레이퍼 회장이 이번 펀드의 대표를 맡았으며, 개인 재산도 출자한다. 22억달러(약 2조2700억원)의 자금을 굴리고 있는 월든인터내셔널은 컴투스·선데이토즈·미래나노텍 등 국내 기업에 투자한 경험이 있다. 미국 실리콘 밸리 상위 5% 이내 VC가 한국에 직접 벤처펀드를 운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회사는 펀드 재원의 51% 이상을 의무적으로 국내 벤처기업과 중소기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지난 12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한국 벤처 투자설명회인 ‘비글로벌 2014’ 행사에서 트로이 말론 에버노트 아태지역 총괄 사장이 한국 스타트업의 기술 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사진 미래창조과학부]

 중기청 관계자는 “유망 벤처를 발굴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육성하는 펀드를 2017년까지 총 2000억원 정도 조성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번 유치로 이미 올해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했다.

 미국계 VC인 알토스·스파크랩 등도 수천만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고, 한국 벤처 투자 의사를 밝혔다. 글로벌 기업이 직접 한국 스타트업 육성에 뛰어들기도 했다. 구글과 SAP는 한국에 각각 ‘구글 캠퍼스’와 ‘디자인 혁신센터’를 짓고 스타트업의 글로벌 네트워킹과 투자유치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일본 VC도 한국 스타트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한일 외교관계는 꼬이고 있지만, ICT 벤처 분야에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국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는 분위기다.

 도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사이버에이전트는 최근 한국에 가장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곳으로 꼽힌다. 2012년 한국에 지사를 두고 한국인 심사역까지 고용, 카카오를 비롯해 내비게이션 ‘김기사’를 제작한 록앤롤, ‘배달의 민족’을 개발한 우아한형제 등에 투자했다. 사이버에이전트는 2016년까지 최대 500억원을 한국 스타트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일본의 유명 VC인 글로벌브레인도 지난해 투자한 파이브락스가 미국 탭조이에 팔리면서 대박을 쳤다. 올해에는 커플 앱 ‘비트윈’을 개발한 VCNC, 게임 일러스트 제작사 엠바이트 등에 투자했다. 스포트뱅크벤처스·라쿠텐벤처스 등 기존에 한국이 진출한 VC도 국내 IT 벤처에 투자를 계속 늘리고 있다.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에 따르면 소프트뱅크벤처스의 올해 7월까지 국내 투자 규모는 346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88억원)의 약 4배로 증가했다. 지난달 국내 1세대 VC인 본엔젤스 벤처파트너스가 최근 일본어 페이지를 오픈하는 등 한·일 VC의 합작투자도 활발해질 움직임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의 자매지인 닛케이산교는 최근 ‘한류 스타트업 일본상륙’이라는 특집 기사에서 “한국의 해외유학생수는 국가 규모에 비해서 경이적이며, 대기업에서 훈련받고 해외경험이 많은 인재들이 한국의 스타트업을 주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 스타트업의 성장이 위협적이지만, 그들이 꽃을 피우기 전에 투자한다면 일본에 득이 된다”며 “한일 정치관계는 얼어붙었지만 한국 스타트업과 일본 투자자는 서로 뜨겁게 접근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의 모델로 삼은 이스라엘의 유명 VC인 요즈마그룹도 한국에 법인을 설립하고, 향후 3년간 국내 벤처에 1조원 규모의 자금을 투자한다. 잠재력이 큰 벤처를 발굴해 해외시장 진출을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요즈마그룹은 나아가 한국을 아시아의 스타트업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전략도 내놓았다. 이를 위해 그룹 최초로 한국에 ‘요즈마 스타트업 캠퍼스’를 설립할 예정이다.

 요즈마그룹의 이번 투자는 이갈 에를리히 회장의 의중이 반영됐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과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 등이 출현하기 앞서 한국에 싸이월드·다이얼패드 등 비슷한 서비스가 상용화한 것을 보고 한국 벤처의 기술력과 아이디어를 눈여겨봐 왔다.

 에를리히는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기술적으로 앞서 있으며, 삼성·LG와 같은 글로벌 기업을 성장시킨 특유의 DNA가 있다”며 “한국의 창업 생태계가 부진한 것은 기술이 아닌 글로벌화의 문제이며, 적절한 플랫폼을 지원해준다면 아시아의 벤처 허브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해외 VC의 한국 투자가 잇따르고 있는 것은 한국 벤처의 뛰어난 기술력과 글로벌 감각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최근 1세대 창업자들이 만든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으면서 마케팅·네트워킹·재무·법률 분야에서도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여기에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ICT 인프라가 구축돼 있어 스타트업이 성장할 환경을 갖춘데다, 정부에서도 정책적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사이버에이전트 유정호 수석 심사역은 “실리콘밸리에 견줘도 뒤지지 않는 아이디어에, 영어를 잘하는 창업가들이 늘면서 글로벌 감각도 뛰어나다”며 “해외시장 개척이란 측면에서 한국 스타트업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VC 입장에서는 높은 투자 수익도 기대된다. 투자한 한국 벤처의 주식 가치가 오르거나, 증시 상장(IPO) 또는 기업 인수·합병(M&A)을 성사시키면 많게는 수백%의 투자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

 은행권청년창업재단(D.CAMP) 이나리 기업가정신센터장은 “전세계적으로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기술력을 갖춘 한국의 유망 스타트업은 해외 VC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며 “다양한 창업자금이 공급된다는 점에서 국내 벤처 생태계에 활기를 불어 넣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타트업 입장에선 창업 자금 끌어들이기가 더욱 수월해질 전망이다. 사실 그간 한국의 VC는 지나치게 안정성을 중시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업력이 오래돼 검증이 끝난 기업에만 자금이 몰렸다는 얘기다. 중기청에 따르면 지난해 VC가 지원한 기업 가운데 49.3%가 창립 7년이 넘은 ‘후기 단계’ 기업에 집중됐다. 설립 3년 이내인 ‘초기 단계’ 기업은 26.7%에 불과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해외 VC의 한국 투자로 ‘돈줄’이 트일 수 있다는 게 스타트업이 갖는 기대다.

 해외 VC를 교두보로 활용해 이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한 글로벌 공략도 가능해진다. 해외 VC는 투자를 결정하면 수익을 극대화하고 해당 기업을 키우기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제공한다. 일단 발탁이 되면 해외 벤처 시스템을 통해 성장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박철규 이사장은 “벤처 투자가 늘고, 정부 지원책도 많아지면서 최근 분위기가 ‘제2의 벤처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이럴 때일수록 우수한 인재들이 창업을 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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