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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패션 50년 (17) 연우회 일본시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국과 파리를 거쳐 동남아 및나라를 돌아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인 일본 동경에 내린 나는 잠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일본에서 공부한 것은 1930년대였고 그 사이 3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으니 많이 달라졌으리란 예상은 했었지만 방금 돌아보고온 구미의 대도시 못잖게 성장한 동경이 너무나 낯설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의 패전국이라는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게 번화한 은좌거리는 여전히 일본의 유행을 주도하고 있었다. 내가 공부하던 당시 일본여인 열명중 양장차림이 셋이면 일본옷이 일곱이었던데 비해 30년사이에 양장인구가 많이 늘어서 60년에는 그 비율이 오히려 반대(양장7·일본옷3)로 바뀌어 있었다.
주로 50대이상 중노년층에서 입고 있는 일본옷도 기모노의 넓은 소매부리(다모또)가 짧게 줄어져 현대생활에 맞게 전통의상조차 복장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쉽게알 수 있었다.
그곳 양장계의 현황을 두루 살피는 동안 일본은 우리나라의 6·25덕에 미국의 군수기지 역할을 함으로써 패전의 상처를 쉽게 회복했고 이로 인한 호경기에 힘입어 양재학교 수만 전국에 2천7백개교가 넘고 학생수도 50만명을 돌파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양재학교로서 첫손 꼽히는 문화복장학원은 개교37년동안 이미 13만명(60년당시)에 달하는 졸업생을 내었고 재학생수도 1만5천명이라는 대단한 숫자를 자랑하고있었다.
드레스 메이커 여학원 역시 31년의 긴 역사속에 7천명 재학생중 1천5백명을 기숙사에 수용할만큼 방대한 시선을 갖추고 해마다 3,4명의 우수졸업생을 파리에 유학시키고 있었다.
이들 양재학교 졸업생들은 일류백화점이나 복장회사에 디자이너로서 취업하거나 개인상점을 개업하지 않으면 아직 양재학교가 없는작은 지방도시에서 학윈을 열기도 하는등 활발한 진출을 하고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양장계는 이미 서양의 유행을 무조건 추종하거나 모방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물론 일본 양장계 종사자들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국민모두의 자각과 생산업계의 뒷받침등이조화를 이루고있다는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부럽기 이를데 없는 일본의 현실을 보고 필자는 대한복식연우회회원들에게도 디자이너로서의 안목을 넓히고 자극이 될수있는 일본여행의 기회를 마련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 기독교 경제인 간담회(CEC·회장등평중웅)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러한 내희망을 말했더니 그들은 뜻밖에도 선뜻 자기들이 초청자가 돼주겠다면서 『안그래도 우리 일본인들은 한국에 너무 죄를 많이져서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선생의견처럼 그런 식으로라도 도움이될수있다면 오히려 저희들이 고맙고 기쁜일이지요』라고 종교인들 답게 민족적인 사과의 말까지 덧붙였다.
그래서 의외로 쉽게 뜻을 이룬나는 초청관계 서류를 받아들고 총총히 귀국길에 올랐다.
이렇게 해서 연우회 회원들의 일본양장계 시찰은 내가 귀국한지 한달만인 60년11월에 이루어졌다. 빨리 떠나고 싶은 욕심에 채 절차도 끝내지 않고 비행기 예약부터 해놓았더니 출국전날까지 여권이며 비자가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막상 떠나던 날은 일행중 몇명은 금포공항에서 발을 동동구르고 다른 몇명은 의무부에서 서류를 기다리는등 생난리였다.
다행히 비행기가 몇십분 연발하는 바람에 경우 겨우 탑승을 끝낸일행은 권갑정·금경애·금구옥·방재숙·석주선·석춘복·최복려·한희도 제씨와 필자까지 꼭 10명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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