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 더위로 수돗물도 ″열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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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프리카를 하나의 거대한 저택에 비유한다면 나일강은 그 길목이요, 피라밋은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나일의 물줄기를 거슬러 아프리카의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문턱이 바로 누비아사막의 입구이자 수단의 최북단도시 왜디핼파(Wadi Halfa=큰 계곡이라는 뜻)다.
40시간의 뱃길여행 끝에 도착한 왜디핼파는 지금까지 지나온 이집트와는 전혀 다론 세상이었다. 카이로에서 애스원까지는 나일연변에 도시의 면모를 갖춘 시가지가 군데군데 이어져 있고 수로를 따라 밀·사탕수수·파인애플·채소밭 등이 야자수 그늘과 함께 더위에 시달린 대원들의 눈을 시원하게 해줬지만 왜디핼파는 이곳을 다녀간 외국인들이 지어준 별명처럼 왜디 헬(지옥의 계곡), 바로 그것이었다.
해가 떠있는 동안은 기온이 계속 섭씨50도위로 치솟았고 초록색이라고는 풀한포기 찾아볼 수 없었다. 집들도 이집트에서처럼 돌이나 벽돌대신 흙을 빚어 담을 세우고 지붕은 덤불을 얹어 해를 가린 것이 고작이었다. 1년내내 비가 내리지 않으니 지붕은 햇빛만 가려주면 그만인 것이다.
사람들의 얼굴도 높은 코, 큰 눈, 회색 피부와는 달리 검은 피부에 이마와 뺨에 흉터를 낸 누비아족이나 키가 장대같고 얼굴이 말처럼 긴 딤카족이 대부분이다. 이집트여인들의 온몸을 휘감은 까만 차도르 대신 이곳 여인들은 요란한 원색의 천으로 몸을 둘렀다.
몸매가 뚱뚱할수록 미인이라는 이집트와는 달리 매우 날씬했으나 수줍음을 많이 타 카메라만 들이대면 얼굴을 외로 꼬았다. 마주친 여인들의 눈매는 사막을 태우는 태양처럼 열기를 뿜었다.
왜디핼파에 도착한 탐험대는 이곳에서 수도 카르용까지 펼쳐있는 누비아사막을 통과하기위해 차량을 물색해 봤으나 롤리(화물트럭, 수단에서는 트럭이 시외버스처럼 운행되기도 한다)가 정기적으로 다닐 뿐 대중교통 수단은 열차밖에 없다.
이 열차는 애스원∼왜디핼파간의 여객선을 기다려 승객을 실어 나르고 있어 출발시간은 여객선 도착시간에 따라 바뀐다고 했다. 배는 8월17일 도착했으나 콩관을 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기 때문에 기차는 18일 상오10시에 떠나고 수도 카르룸까지는 약1천㎞, 40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역장의 말이었다.
시속25㎞(?). 그것도 정상적으로 운행될 경우 가장 적게 소요되는 시간이었다.
다음날 떠날 열차를 기다리며 대원들은 17일하오 나일강으로 나가 땀과 모래먼지로 찌든 몸을 씻고 저녁에는 하룻밤 자는데 1파운드(약8백원)짜리 나일호텔을 빌어 48시간만에 밥을 지었다.
하루종일 섭씨50도이상 치솟는 불볕더위로 수도꼭지에서는 펄펄 끓는 것 같은 물이 나왔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마실 물은 반드시 토기로 만든 물동이에 넣어 그늘아래 두며 이 토기는 물이 항상 조금씩 새어나와 표면을 적시기 때문에 물기가 증발하면서 열기를 빼앗아 시원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휴대용 물통도 양가죽처럼 물이 배어나오는 것이거나 두꺼운 천으로 씌워 물을 적셔두지 않으면 뜨거워져서 마실 수가 없다.
18일 새벽 일찍이 역으로 갔더니 역광장 땅위에서 노숙을 한 승객들이 벌써 벌떼처럼 기차에 달라붙어 있었다. 정복차림의 경찰에게 통사정을 했더니 3등칸 승강구 쪽에 자리를 마련해 줬다.
출발 때까지 2시간정도가 남아 역주변과 열차의 면면을 살펴봤다. 기관차는 일본히따찌(일립), 객차는 1975년형 헝가리산이었다. 기관차 바로 뒤에 물탱크가 2량, 그 다음으로 침대칸, 1, 2, 3등칸이 이어졌고 3등도 보통과 특별칸으로 구분돼 있었으며, 우리가 탄 곳은 3등 특별칸으로 15량의 객차가운데 끝에서 5번째였다.
객차는 통로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초만원. 40시간을 서서 갈 사람들이 저렇게 많다니, 앉아있는 사람이 먼저 피곤을 느낀다.
10시에 간다던 열차는 그러나 12시가 지나고 하오1시가 돼서도 꼼짝하지 앓았다.
사막 모래벌판에 서있는 열차는 내려 쬐는 태양일용 직사로 받아 차속은 한증막 바로 그것이었다.
출발시간이 멋대로 늦어지고 있는데도 의아해하거나 항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오3시가 지나서야 위쪽에 화물칸을 연결하더니 덩치 큰짐을 싣기 시작했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결국 하오6시.
사진 김택종기자
글 홍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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