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만은 한점 흐림 없기를…"|김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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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옛 어른들 말씀에 『제자식 낳아 길러봐야 부모 마음 헤아린다』했거니와 내가 딸들을 길러 이제 그 애들이 다 자라 성인의 고비에 이르게 되니 아닌게 아니라 내 마음 짚어 어머님의 노고와 은혜를 새삼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요즈음이다.
흔히 부모의 자식 사랑의 고통을 일러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고들 있지만 유독 어머니의 딸에 기울어지는 사람은 아들에 대한 그것보다 더욱 갚고 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왜 그럴까? 그건 다름아니라 딸은 내(어머니인)전신이요, 내 분신이며 또한 내 모습 그것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기에 무릇 모든 어머니들은 마치 귀하고 귀한 한포기 화초를 가꾸듯, 자기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가꾸듯, 아니 그 이상의 정성으로 딸을 고이고이 키우는 것이다. 제발 나의 결함이 내 딸에겐 없기를, 부디 나에게 있었던 작고 큰 불행이 내 딸에겐 없기를, 내 딸만은 한점 티끌도 묻지 않고 순결하기를, 내 딸만은 한점 흐림도 없이 청정하기를…하고 어머니들은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지성으로 빌고 또 비는 마음인 것이다.
티없이 맑은, 옥같이 깨끗하고 귀하고 곱고 아름답기를 신께 축원하며 그러한 딸들의 성장을 눈부신 행복감으로 지켜보기 위해 오랜 세월을 온갖 고초와 곡절을 입술을 깨물며 참고 견뎌 오고 있는 것이다.
하기에 딸들이 어느날 홀연히 어머니의 품, 그 둥지를 떠나 두 나래 훨훨 자신의 하늘을 향해 날아가 버리더라도 어머니는 슬픔과 섭섭함은 접어두고 오로지 딸의 하늘을 향해 축복의 뜨거운 눈물을 선사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딸들이니 다 큰딸을 가진 어머니의 마음이 어떤 것일까는 굳이 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늘 조심스럽고 늘 마음이 쓰인다. 곱게곱게 길러내 딸을 행복하게 해줄 배필을 골라 시집보내서 남부럽지 않게 아들·딸 낳아 두 내외 의좋게 오손도손 재미있게 잘 사는 것 보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심정, 이것이 어머니의 진정인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아들에게보다 딸들에게 더 타이름이 많다.
그리고 현대적 어머니라고 자부하는 엄마도 별수 없이 봉건적 사고의 울타리 안에서 뱅뱅 돌고 있을 뿐이라고 딸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본질에 현대적이고 봉건적인 차별이 없다는 것을 너희들도 이 다음에 자식을 낳아 길러보면 그때서야 알리라』이다.
요 며칠사이 매스컴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여대생 피살사건을 접하면서 딸을 둔 어머니로서의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인명경시의 가공할 요즈음 인심과 세태에 분노보다 오히려 허탈을 느낄 뿐이다. 귀한 사람의 목숨을 파리 한마리 죽이듯 손쉽게 다루는 인면수심의 인간들을 이웃해 산다고 생각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고 세상 살맛이 다 없어진다.
어쩌자고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으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인심이 이 지경이 되고있단 말인가? 참으로 아연실색·망연자실해지는 실정이다. 딸을 고이 길러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이제 얼마후면 좋은 배필 골라 시집 보내려던 그 어머니의 피눈물 괴는 비통은 어떠할 것인가.
이 무서운 현실 앞에서 비단당사자인 그 여대생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모든 어머니들이 비통에 빠지고 허탈에 빠져있다. 어디 어머니들뿐이겠는가. 범인은 스스로 죄를 뉘우쳐 법 앞에 나서고 이후로는 꿈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한다.
◇약력 ▲33년생 ▲성대국문과·경희대대학원졸업 ▲68년 현대문학지데뷔 ▲78년 월탄문학상 수상 ▲시집『화음』『바다에 내린 햇살』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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